2020년 7월 18일 토요일

현실은 장르문학의 거울이다? (스토리셀러/유니, 토후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라이프)


당연히 이런 사람을 처음 보는 게 아니다.

나는 이런 부류를 사이버 토후라고 부르고 싶다. 상대적으로 영역이 새롭거나 작은 공간에서, 오로지 당사자성을 제증명하는 방식으로만 자기 주장을 나열하는 사람들 말이다.
스스로의 배출물을 먹고 다시 배출하는 자기반향실에서 분수에 넘치는 몸집을 키운 이 토후들은, 자기 능력이 검증되는 것보다 빠르게 성장한 발언권의 채널과, 고향을 향한 향수병적인 열등감과 적대감, 과도한 자기연민을 특징으로 삼는다. 불합리한 가상의 적 아래, 이들은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다죽여가 된다. 잃어버린 적 없는 영토를 되찾는 정당한 계승자이자 성배를 찾을 신성한 운명을 스스로 부여한다.
이들은 그 자리의 정립되지 않음을 무기삼아 휘두르길 즐기는데, 가령 이런 식이다: 어떤 단어나 사건에 대해 이미 준비된 말이 존재하고, 이를 최대한 많이 나열해 유사-권위와 유사-지식 권력을 흉내낸다.
독도 없으면서 형광빛으로 빛나는 어떤 개구리들처럼, 단호하고 빠르게 나열되는 트윗들은 상대방을 겁주어 쫓아내는데는 충분한 효과를 발휘한다(강조되고 반복되는 트윗은 나어린 트위터 유저들을 불안하게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보를 검증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은 가짜 뉴스의 시대에서 굳이 설명치 않아도 되리라 믿는다.
특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들이 차지한 작고 새로운 영역들에는 경쟁자가 특히나 적으며, 따라서 정보를 검증하는 데에 더욱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거나 상황에 따라 불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권위와 신뢰를 가진 정보로도 한번 퍼진 오정보를 걷잡기란 대단히 힘든데, 합의는커녕 합의체조차 없는 영역에서는 아예 오정보의 검증이 불가능하다. 다만 트위터 특유의 짧은 기억력만이 가끔 이를 지워낼 뿐이다.
검증 불가능성은 그 자체로도 이론의 신빙성을 저해할 수 있지만, 검증보다는 믿음이 미덕인 트위터 같은 환경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검증 불가능한 것이야말로 완전무결한 것이 되어버린다.
트위터에서 이런 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퇴치 방법은 없다. 만약 검증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웬만한 크기의 채널을 가지지 못한다면 애초에 정보를 전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은 트위터의 떼정동의 바람이 바뀌어 본인의 채널과 공명할 날을 기다리는 것이며, 그때까지는 알아보고 미리 피함으로써 심신의 건강을 온존해야 한다.

그러나 어쩔 때는, 예를 들어서 '장르 작가가 현실과 얼마나 분리될 수 있는가' 같은 일에서는, 결국 사이버 토후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내가 토후를 만났을 때 How I met your tofu

김봉곤의 '그런 생활'이 공론화되고 양측의 1차 입장문이 나온 시점이었다. 이미 비슷한 사건을 봤던 나로서는 양측의 입장문을 면밀히 살펴볼 수밖에 없었고-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소리를 했다. (부정적인 뉘앙스라도 동의하면서 속마음으로 거절한 것은 거절이 아니라는 둥. '그런 생활'에서 본격적으로 혐오당하는 것은 전애인 역이며, 오랜 친구이자 동종업계로서 이런 작업 과정을 잘 알것이며 조언까지 구하는 사이인 C누나에게 왜 표면적인 동의까지 얻은 카톡만큼은 문제가 되냐는 둥. 손정우-박원순-김봉곤이 연달아 일어나면 다 똑같은 사건이 되냐는 둥.) 아무튼 밉스러운 짓을 열심히 했다.
그러던 와중에 곁가지로 나갔다.
'현실을 무대삼는 소설가들은 주변 인물에게서 소재를 따올 것이다.
특정한 소설에서 고통 받는 피해자가 이례적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동시대의 문학 전반에 숨어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런 윤리 기준이 현대적이라면, 이전까지 '순문학'의 생산과 소비가 그에 미달한다면, 여태까지 순문학을 생산하고 소비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 문제를 보고 1초만에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사생활에 극도로 가까운 것을 보고 싶지 사생활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는 항의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일단 이 글의 주제가 아니므로.)
그러다가 이런 트윗을 했다.



공론화는 공론의 과정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공론된 문제에 대해 법이 아니라(이미 법에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된 것이므로) 윤리, 도덕, 민심을 논할 수 있다. 공론화된 사안은 소수의 판사에게서 수십 만 명의 판사에게로 넘어간다.
그중에 '같은 작가로서 이는 잘못된 것이다'라는 소명도 있었다. 순문학, 혹은 문단 문학가들도 있었고 장르문학, 혹은 장르 소설가들도 있었다.
나는 '같은 작가로서' 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극단적으로 건축과 무용은 예술 아래 있지만 '같은 작가로서' 묶을 때는 상이한 점이 많다. 연극과 영화는 비슷한 점이 많지만 결정적인 차이들이 있다.
장르문학과 순문학도 비슷한 점이 많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구분지어 부른다(이런 층위부터 차근차근 쌓아나가야 한다니). 언중은 같은 의미의 단어라도 두 개가 있으면 미묘한 뉘앙스를 분리한다.
장르문학이 순문학의 사생활 침해 문제에 선뜻 나서서 '후지게 썼으니 고쳐라'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비유하자면, 반농반목의 부족이 목축 부족에게 목축은 고통을 초래하므로 그만 두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트위터에 의하면 그렇다고 한다.







a. 스토리셀러/유니 (@Stoseller):
a-1. 장르는 환상의 동의어가 아니며 리얼리즘의 반대에 있지 않다. 추리, 스릴러, 호러 같은 곳에서는 재현의 윤리가 논의되며, 장르는 독해의 틀에 지나지 않으므로 순문학도 장르에 포함할 수 있다.
a-2. 픽션은 현실보다도 강렬한 경험을 줄 수 있다. 장르는 독자가 어떤 상황을 기대하는지의 여부이고, 그 안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 논의되어 왔다.
a-3. 이 문제에서 장르작가를 구분하는 것은 장르를 탈현실로 보는 것이며, 과학소설을 기술중심적으로 보는 것이다.
a-4. 그리고 문학은 시대를 다루므로 민중 언어 그 자체의 교차점이다(?? 네.) 과학소설을 공상과학이라 부르는 건 인식이 멈춘 것이다

b. 새벽닭(@dawnchick01):
현실을 가공하여 허구적 세계를 구성하는 건 사실주의도 마찬가지다.
운수좋은 날에는 퀴어가 언급되지 않고 아내의 고충은 언급되지 않는다. 퀴어나 여성은 이를 보고 사실을 정확히 그려냈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장담한다.
(순문학보다) sf나 판타지가 무조건 탈/비현실적이지 않다.

c. 아비규환타지(@gagoram):
작품을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독해하는 방법이 가장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네.).
뇌 없이 가만 앉아서 현실적이네 아니네 투덜대는 건 어리석다. 현실은 일종의 스크린이기에 이를 그려내는데 장르가 더 적합할 수 있는데, 장르문학이 비현실적이라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2. 트윗의 진부성 Banality of tweets

이러한 의견들은 마치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는 인형처럼 '장르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버튼에 대한 의견들로 보인다(개비개비처럼 음악 상자가 고장나지는 않기를 빈다). 그야말로 트윗의 평범성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이다.
어쨌거나 내 트윗으로 촉발되었고 각자의 논지가 있다.
각각의 논지를 C-B-A 순서로 되짚어가며 내 트윗의 논지인 '1. 장르는 현실과 적극적으로 구분됨', '2. 장르문학이 이번 사건에 있어서 단호하게 굴기는 애매함', '3. SF는 과학지 등에서 소재를 많이 의존함'과 비교해 보자.


2-1. '알레고리'와 현실이라는 '스크린'

c. 아비규환타지(@gagoram):
작품을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독해하는 방법이 가장 적극적으로 작품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다(?? 네).
뇌 없이 가만 앉아서 현실적이네 아니네 투덜대는 건 어리석다. 현실은 일종의 스크린이기에 이를 그려내는데 장르가 더 적합할 수 있는데, 장르문학이 비현실적이라는 건 시대착오적이다.

2-1-1. 알레고리(allegory)는 '다른 것을 말하기', 혹은 '돌려 말하기'라는 어원을 가진다. 기본적으로는 표면적인 이야기와 숨은 이야기를 말하며, 은유(metaphor)나 비유(analogy)를 이야기 단위에서 실행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작품을 알레고리로 본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와 '숨은 이야기'로 본다는 것이다. 맥락상 표면적인 이야기는 장르(아마도, 비현실)이고 숨은 이야기는 메시지(아마도, 현실)를 지칭하는 듯하다.
근데 이걸…… 말해야 아나?
표면적인 이야기라는 것은 더 이상 할말이 없는 훌륭한 완충재다.
독자에 따라서는 표면적인 이야기만 볼 수도 있다. 아슬란은 사자일 뿐이지 하느님의 은유가 아니다. 작가는 표면적인 이야기를 우연히 썼다고 주장할 수 있다. 나니아 연대기는 일곱 행성을 모티프로 삼은 게 결코 아닐 수도 있다. 작가가 무엇을 따왔는지는 '표면적인 이야기' 아래에 묻히며 오로지 맥락으로만 유추된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야기'를 쓴 것이니까. 그게 드러나면 숨은 이야기겠는가?
이는 장르문학에 국한되는 건 아니나, 알레고리의 경우 보통 우화 형식을 취하거나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허구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장르와 이미지가 비슷하다.
지적하자면 장르의 표면에는 비현실이 있으나 심층에는 현실적인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소리는…… 이미 현실과 비현실의 위계를 나눈 건 아닌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현실을 표면으로 비현실을 숨기는 경우가 있나?
장르를 알레고리로 해석할 시 현실과 관련이 있다는 말은 오히려 장르는 그저 겉보기에 불과하고 숨은 현실 찾기에 중점을 둔다는 말이 될 수 있다. 장르가 자립하지 못하고 숨은 현실에 기대야만 한다면 장르는 단지 위장 도구에 불과해진다. (모든 걸 그렇게 보자는 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의 인물을 끌어올 필요가 줄어든다'는 말에 반박한다면 '모든 장르는 현실을 끌어올 필요가 있다'는 말이 당연하지 않나? 아니라면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닐까?)
2-1-2. 또한 현실은 일종의 스크린이라는 것은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미디어에 표현된 현실'을 말하려는 듯하다. 전쟁에서 전투기 파일럿의 멋진 모습만 찍은 현실도 있지만, 폭격에 죽는 민간인 등의 현실도 있다. 두 개는 무엇이 더 진짜인 현실인가가 아니라 그저 다르게 조성된 동등한 층위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장르 역시도 같은 맥락이라는 말을 하려는 모양이다. (내 나름대로 최대한 친절하게 해석한 것이다)
현실이 일종의 스크린이기 때문에 장르가 현실을 그려내는데 더 적합할 수 있다…… 일단 알레고리의 경우처럼 '현실을 그려내는 데 적합'하다는 말은 현실의 위계를 높이 치는 뉘앙스가 남아 있다. 그걸 제외하더라도 '현실은 스크린'이라는 말은 '스크린은 현실'이라는 말이 아니다.
현실이 스크린이라는 것은 현실의 비자연성, 구성성을 짚는 데 가깝다. 우리가 자연스럽고 단일한 현실이라 지각하는 것이 제작된 영상처럼 선별된 것이라는 뜻을 전하기 위함이다.
장르의 스크린은 스크린이 남는다. 영화나 문학은 몰입의 경험을 주지만, 스크린이라는 하이퍼매개체를 둔 몰입이다. 스크린은 시청자-독자에게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시키는 물화된 장벽이며 본질적으로 비현실의 가능성을 품는다(당신이 데카르트가 아니라면). 스크린은 알레고리에서 표면처럼 훌륭한 완충재가 된다.

2-1-3. 따라서 나는 1. 장르는 현실과 적극적으로 구분됨이라는 논지를 폐기할 이유가 없다. 장르가 알레고리거나 스크린이라면, 표면과 스크린은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구분점이 되기 때문이다.


2-2. 당사자주의와 장르

b. 새벽닭(@dawnchick01):
현실을 가공하여 허구적 세계를 구성하는 건 사실주의도 마찬가지다.
운수좋은 날에는 퀴어가 언급되지 않고 아내의 고충은 언급되지 않는다. 퀴어나 여성은 이를 보고 사실을 정확히 그려냈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장담한다.
(순문학보다) sf나 판타지가 무조건 탈/비현실적이지 않다.

2-2-1.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경험하는 현실과 비이성애자 비백인 비남성이 경험하는 현실은 다르지만 둘 다 현실이다. 무엇이 현실적인지는 각자의 현실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당사자주의다. 그럼 운수 좋은 날은 여성이나 퀴어에게 완전사회나 다를 거 없는, 또는 비슷한 허구인가?
먼저 말하고 싶은 점은 운수 좋은 날이 쓰였을 시점에는 퀴어가…… 없다. 퀴어 정체성은 태고로부터 내려오는 게 아니라, 50~60여 년 동안 적극적으로 쌓아올린 구성물이다. 운수 좋은 날이 발표될 1924년에는 아직…… 없다. 동성연애자나 남색가, 여색가, 그리고 이성애자의 섹슈얼리티도 달라서 결혼과 연애는 아직 구별된 개념이었다(그…… 이광수의 무정이라고…… 있습니다). 젠더, 섹슈얼 오리엔테이션, 섹슈얼리티의 구분과 연결이 소급될 때는 주의를 요한다.
그래도 여성은 있었다.
그럼 여성에게는 운수 좋은 날이 허구로 느껴졌는가? 이것도 좀…… 이광수의 무정이 신문지상에 연재될 때는 독자들이 실제의 이야기라고 착각하고 편지를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놀랍게도 '문학'이라는 것 역시, 구성물이라서, 독법을 문화적으로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 전등신화 같은 소설을 향유하던 것도 식자층이었기 때문에 가장 기이한 이야기조차도 당시 사람들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나는 사실적이라 느꼈다고 장담한다(김동리 '산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2-2-2. 그럼 지금 사람들을 기준으로, 여성에게는 운수 좋은 날이 허구로 느껴질까?
기준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당사자주의로 돌아가자. 당사자주의는 '다른 현실'을 허구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당사자주의는 '단 하나의 현실'이 아닌 '여러 가지의 현실', '교차되는 현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현실을 표방한다면 당사자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할 이유는……?
반대로 장르의 경우에는 2-1에서 말했듯 현실과 비현실을 적극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면 누구의 현실인가? '이것은 나의 현실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정말 '내가 경험하는 현실'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를 말하는 것인가? 후자는 은유다.
어떤 작품이 '모든 현실'을 포착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어떤 개인이 모든 현실을 포착하지도 못한다. 개인이 현실을 포착하는 방법은 귀납적이며, 현실에서 귀납적으로 포집한 현실과 작품에서 드러나는 현실이 배치되지 않는 이상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느낄 이유는 적다.
장르는 현실적이지 않은 것, 혹은 개연성이 부족한 현실도 장르라는 이름 아래에 차용하기 쉽고 또한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장르는 우리의 시야를 고정하기도 한다. 순문학이란 표지가 붙으면 마술적인 리얼리즘이나 토도로프적 기이가 등장한대도 최대한 현실적으로-예를 들면 주인공의 정신병이나 약물, 환각, 착란 등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없다면 우리는 이미 장르의 구분을 무너뜨렸을 것이다.
오슨 스콧 키드는 이런 경향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설명한 바가 있다. '그녀의 금속성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대충 이렇다는 거임 당신도 해리포터를 쓸 수 있다 How to write sf/fantasy에 나옴) 이 문장을 줬을 때 장르 문법에 익숙한 사람은 그녀의 발이나 다리가 금속일 거라 짐작할 수 있고, 장르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를 비유적으로 금속처럼 날카로운 발걸음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2-2-3. 따라서, 순문학은 현실에 고착되려는 경향이 있고 장르는 그런 경향이 적거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장르는 약간의 비현실적 요소만으로도 '현실의 사건'이 아닌 것으로 인지되기 쉬우며 아예 비현실적인 요소에 의존하여 글을 쓸 수도 있다.
이것으로 내 논지 '1. 장르는 현실과 적극적으로 구분됨'과 '2. 장르문학이 이번 사건에 있어서 단호하게 굴기는 애매함', 이 주장의 바탕이 되는 '현실에서의 소재 차용과 인식은 장르문학과 순문학에서 그 정도가 다르다'는 전제는 어느 정도 전개됐으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게 만들어주신 스토리셀러님의 주장을 보겠다.


2-3. 권위와 눙치기로 학문을 하나?

a. 스토리셀러/유니 (@Stoseller):
a-1. 장르는 환상의 동의어가 아니며 리얼리즘의 반대에 있지 않다. 추리, 스릴러, 호러 같은 곳에서는 재현의 윤리가 논의되며, 장르는 독해의 틀에 지나지 않으므로 순문학도 장르에 포함할 수 있다.
a-2. 픽션은 현실보다도 강렬한 경험을 줄 수 있다. 장르는 독자가 어떤 상황을 기대하는지의 여부이고, 그 안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 논의되어 왔다.
a-3. 이 문제에서 장르작가를 구분하는 것은 장르를 탈현실로 보는 것이며, 과학소설을 기술중심적으로 보는 것이다.
a-4. 그리고 문학은 시대를 다루므로 민중 언어 그 자체의 교차점이다(?? 네.) 과학소설을 공상과학이라 부르는 건 인식이 멈춘 것이다.


2-3-1. 당당하게 a-1에서부터 범주의 오류로 시작한다.
본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장르라는 용어는 현재 다의적이다. 내가 말하는 장르가 형식상의 장르가 아니라 '옛부터 장르라고 불리던 것들'을 일컫는다는 걸 분명 알아야 한다. 설마 그 정도도 모를까? 그렇다면 매우 참담하겠다.
먼저 '장르는 환상의 동의어가 아니며, 리얼리즘의 대척점에 있지도 않다'는 주장이다. 나는 장르를 환상의 동의어라고 한 적은 없으나, 내가 장르를 호명할 때는 환상적인 부분에 집중하기를 바란 건 맞다.
그러나 내가 '장르소설가들'이라고 했을 때 그중에 추리, 스릴러, 호러 작가가 얼마나 있었는가?
트위터에 추리, 스릴러, 호러 작가가 얼마나 있는가(검은 백조 분들이 있는 건 알겠으니 안 알려줘도 된다)?
대부분이 SF, 판타지, 로맨스, 로맨스판타지, 대체역사 장르다.
맥락을 고려할 때 내가 1. '카테고리'/'범주'로서의 장르나 2. 추리, 스릴러, 호러, 순문학 장르를 부른 것이겠는가?
알고 있었다면 일부러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무시한 것이고, 모른다면 맥락을 읽을 줄 모르는 것이다.

2-3-2. 좋다. 몽실아, 재현의 윤리로 넘어가주자. 그래서 재현의 윤리를 논하는 사건들이 사적이고 알려지지 않은 대상을 주로 하는가? 추리, 스릴러, 호러에서 재현되는 사건들이 대부분 작가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추리, 스릴러, 호러의 재현과 수필, 다큐멘터리의 재현과 순문학, 예술영화 등의 재현을 한꺼번에 묶을 수 있는가? 이걸 예! 아니오! 하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예! 아니오! 하는 순간 수필/다큐멘터리와 순문학/예술영화도 함께 쟁반을 맞고 수영장으로 의자가 날아가거나 아니면 콘페티가 휘날리며 팡파르가 울려퍼진단 말인가? 그러면 애초에 구분은 왜 했는가? 하나가 되고 싶은 건가?
물론 장르와 분류를 불문하는 재현의 윤리, 또는 그냥 윤리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장르와 분류가 의미없어지는가? 비윤리를 범하기 쉬운 장르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장르가 있다. 중국처럼 잘못된 성윤리라며 BL이나 성행위 묘사를 금한다면, 나머지의 '장르'가 창작의 자유를 위해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을 순 있어도 당사자라고 말하긴 애매하다. 그것은 연대와 공감이지 내가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까진 아니다.
그걸 모른다면, 당신은 언젠가 피해자의 서사를 착취할 것이다.

2-3-3. 장르문학이 순문학보다 현실과 적게 관계하며 쓰여질 수 있고, 또한 적극적으로 현실과의 거리를 둘 수 있음도 위에 말했다. 따라서 장르문학과 순문학을 구분하는 건 장르문학이 탈현실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장르문학이 순문학과 다름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다름의 근거로 나는 소재의 차이, 특히 과학기술을 내세웠다.
과학 지식과 기술 정보는 공공재의 성격을 띤다. 왜냐면 그게 서구 근대 사회의 테제였고 아젠다였으며 테마였으니까. '신사와 기술자가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그냥 나온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발견이나 발명은 어떤 사람의 삶을 갈아서 나온 것일 수 있다. 그 사람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사적으로 전유하길 원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공적으로 여겨지니까 공적으로 쓰는 것이다(라부아지에처럼 발견물을 서랍 속에 숨겨버리거나, 발견자 자신에 대한 정보를 숨기는 푸앵카레 문제의 풀이자처럼). 스포츠 선수의 이야기나 역사적 인물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공적으로 쓰듯이 말이다.
누군가가 과학 지식이나 기술 정보에 관심이 끌려 글을 쓴다면, 운좋게도 공공재에 끌리게 된 사람인 것이다.
그건 일종의 행운이다. 우리가 카오스 이론이나 평행우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쉬운 폭발물의 제조법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독재자를 비판하는 이야기처럼 금지되지 않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건 '사생활 침해할 권리가 있다'를 말하는 게 아니다(그럼 걍 앞으로 영원히 글을 읽지 마셈). 적어도 1차 공론화에서는 분명히 애매한 지점들이 있었고 양쪽 모두 공론장에 증거까지 내세우지는 않았다. 당연한 항의와 마뜩잖은 동의가 엇갈렸고, 조치를 취했다는 날짜가 서로 달랐으며, 어떤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어떤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점은 무엇을 금지하거나 금지하지 않으려고 할 때, 이전에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라면-있다고 하더라도 사건에 존중을 표하려면 개별적으로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우리가 형편없는 판사들에게 요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문제들과 같이 묶어 처리했다.
사건의 개별성이 검토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건을 무시하는 일이다. 모든 피해자와 가해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무조건적인 연대와 지지를 표명하는 것도 남의 아픔을 가져다가 후지게 쓰는 것이지만 네 삶이니 네 맘대로 해도 상관은 없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특권이라던 짤이 돌아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남자들은 남자 편만 드니까 여자들은 여자 편만 들겠다, 그런 것도 하나의 전략적 장르이긴 하겠다. 그러나 남자들이 사건에 대해 개별적으로 고심했다면 여자들이 여자 편만 들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기 귀찮다면 적어도 나는 지금 브레이크를 쥐지 않고 있다는 자각은 가져야 한다.
안 그러면 이렇고 저렇게 사이버 토후가 되는 것이다.

2-3-4. 그래서 이런 헛소리 사족까지 붙인다.
공상과학소설이란 명칭에 대한 옹호도 어쨌거나 나름의 이유를 붙여 보았었다. 과학소설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하드한 뉘앙스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고, 공상과학이라는 말의 부정성이 본래적이라기보단(무슨 단어가 본래적이겠냐만) 역사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과학적 소재도 그냥 SF로 집어넣지 않는가(아니면 뭐 유전자가 좀 변한다고 피닉스 포스의 숙주가 되거나 현실을 조작하는 게 존나 과학적인 내용인가)? 스페이스 오페라와 과학소설을 분리하는 건 하드SF 시절의 잔재 같지 않나? 또는 SF를 재정의하면서 '사변 소설 speculative fiction'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경우엔 공상이 굳이 안 붙을 이유도 없다. 과학 소설이 되어야 한다면 이는 정치적이고 퍼포먼스적인 선택이다. 거기에 당위는 없다.
그래서 과학 소설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기술중심적인 SF를 비판하는 것도 웃기지만, 과학 소설이 과학을 주된 소재로 사용하는 SF라는 건 지금 나오는 SF들도 60~80년대 과학자 핑퐁 대화(이건 어쩌구 기술입니까? 그렇네. 어쩌구저쩌구한 작용으로 어쩌구하는 것이지. 그렇군요. 어쩌구저쩌구한 건 알고 있습니다. 하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배경 설명을 굳이 하는 것)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부정할 수 없이 훌륭한 SF 작가인 테드 창의 엽편 중 메타인류에 대한 것이나 1초뒤예지머신, 앵무새이야기 같은 것은 아예 인물의 정보 없이 보고서 형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이 경우는 보통 원고 청탁을 받아 빠르게 써낸 경우지만).
장르가, 과학 소설이 현실의 이야기를 더욱 끌어와 직조할수록 더욱 아름다워지기는 한다. 과학 소설은 소설이니까. 하지만 장르의 비호 아래서는 그것이 없어도 허용이 된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내 생각에, 장르소설가에게 이 문제는 약간 거리를 둘 수 있즌 문제가 된다. 말마따나 '온전한 자기 삶'이라기엔 애매한 것이다.


3. 결론

나는 장르문학의 독자이고 또 작가이기도 했다.
민담을 채록하거나 관습을 관찰할 때 원주민의 말을 무시하는 문학자/인류학자가 있다면 그 인간이 어떻게 보일까? 장르 연구자를 참하면서 본인이 규정한 정의만 외는 걸 보니 참으로 재미가 있고 존경스럽다.
고아 의식이라는 게 있다. 윗세대와 단절되어 자수성가한 세대에게 주로 붙는 멘탈리티다. 누가 자수성가를 했냐만은 일단 넘어가고.
이들은 윗세대의 의견은 고리타분하다며 무시하고, 아랫세대의 의견은 경험이나 지식이 없다며 무시한다. 물론 모든 세대가 자기 세대가 가장 멋진 세대라고 생각하기는 한다.
그런 자아를 조금이나마 깎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나마 흉내를 내는 척이라도 하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이렇게까지 실망스럽지 않았을 듯. 사실 뭘 분석하는지도 모르겠음. 입장문에 비통하고 한국문학 다 망해야 하고 문학 안 산다며 분개하는 것치고는 입장문을 제대로 본 적도 없는 거 같던데 아마 다 비슷한 웹소설에서도 개개의 차이를 찾아낼 수 있는지도 의문이고 걍 죄다 존나 의아하다.
끝.

2019년 3월 23일 토요일

2019년 3월의 인터넷 세상

(제목: 우리 사는 하나 뿐인 쓰레기장)

해를 거듭할 때마다 트위터 자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던 거 같다. 처음엔 친목을 위한 소소한 '사이트'였고, 다음엔 어쩐지 의로워 보이는 이들이 모인 사회적 공론장이었으며, 다음은 식별표를 달고 패싸움을 하는 모두가 미친 장소로 보였고... 그리고 지금은 그냥 말도 안 되는 무한한 넓이의 쓰레기장으로 보인다. 쓰레기장은 나름의 생태계를 형성한다. 남은 영양을 찾아 먹는 까마귀, 너구리, 개(대부분 웰시코기)와 고양이와 곰이 있다.
그리고 유령이 있다.
2019년 3월에 아직도 트위터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쓰레기장에 몸을 뉘였다는 이야기다. 이곳에 있는 말들은 저밖에서 뭔 가치를 지녔었든 하나의 쓰레기가 됐다. 그 내용적으로 쓰레기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판단해야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쓰레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말이 쓰레기라니, 내가 만약 그 쓰레기 생산자의 하나라면 이는  양비론적을 통한 책임회피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것은 나쁘다.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쓰레기를 버리는 것밖에 없다고 정당화하는 것도(아니 쓰레기장을 떠나면 되잖아? 하지만 바깥의 청정한 환경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겠고).
이 글에서 나는 트위터에서 사는 사람들은 나쁘고 나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저급수에 적응해버린 사람들이라서.
그런데 나쁘다는 판단은 무엇인가? 해당 행위를 하지 말거나 수정해야 한다는 판단을 선언한 것이 아닌가? 이 트위터라는 쓰레기장에서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것이 나쁘다 하더라도, 안타깝게도 달리 바꿀 방법이 없다.
사람들이 트위터에서 한 말에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책임을 진다면 당신이 쓰레기를 버리는 장면을 걸렸을 때 뿐이며 그조차도 쓰레기가 아니라 쓰레기를 버린 당신이 누구인가에 따라 죄악의 근수가 달린다. 또한 주목됨의 정도에 따라서 그 값이 곱해진다(주목되지 않으면 줄고, 지목당하면 는다). 무엇보다도 흐름에 맞춰야 한다. 저마다 타고 있는 플로우에 맞추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상대적으로 거꾸로 가게 되기 마련이다. 엄청나게 많은 붉은 여왕들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쓰레기장을 돌린다. 그 결과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새로운 쓰레기들이 생성된다.
이 나쁜것 구분법과 쓰레기 생산법은 나한테는 좀 이상했다. 본 내추럴 아싸라서 그런지 트위터에 제대로 들어가자마자 한달만에 싸우기 시작했다. 16년에는 어떤 조직된 논리를 만들면 될 줄 알았고(정체성) 17년 상반기에는 그들이 했던 말을 다시 보여주면 될 줄 알았으며(미지) 하반기에는 서로 쓰레기로 인정받은 것으로부터 쓰레기임을 구분하게 하면 될 줄 알았다(블쉐가이드). 모두 안 됐고, 내가 만든 쓰레기도 많았고, 나 자신도 쓰레기임을 깨닫고, 18년에는 결국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쓰레기를 던졌다. 근데 그것조차 별 의미는 없었다.
갈수록 쓰레기의 양만 훨씬 많아졌고 어떤 방식으로건 나와 당신들은 쓰레기에 압사당하거나 헤엄쳐 나오거나 했다. 움직이기엔 너무 거대하고 영향받지 않기엔 너무 거대하다.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교훈을 짜내 보자. 사람들이 쏟아낸 말들, 쓰레기장에서 쓰레기의 주인들을 찾아주려 노력해도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 쓰레기를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서 뭔가를 재활용해내지만, 그것이 정말 쓰레기보다 가치가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순식간에 다시 원래 조각들만큼의 조각으로 무너진다는 것도, 그리고 계속 그런 게 만들어진다는 것도 알았다. 이걸 알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의심스러운 일임을 알았다.
이곳의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고 궁극적으로 쓰레기로 환원되어 버린다. 그런 쓰레기들이 이곳에 자유롭게 버려지고 방치되며, 당신은 쓰레기로부터 잘 구분되지 않는다. 당신은 분리수거되지만 재활용되지는 않는다. 게토의 주민들이 또는 혼자 사는 괴짜가 각자의 매립과 각자의 소각을 한다. 만인이 만인에게 쓰레기호더다.
이 트위터 속에서의 '쓰레기됨'은 물리적 필연인 거 같다. 다른 SNS나 인터넷 플랫폼보다도 심한데,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꼽아볼 수 있겠다. 하나는 당연히 분량의 제한이다. 분리수거할 때의 쓰레기가 작은 조각으로 분쇄되듯이 1~140자 사이의 토막으로 조각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언어는 한 장의 사진과 다름없으며 실제로 사진의 포맷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모두가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다른 플랫폼의 쓰레기는 대형 생산자가 점차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는 듯한데 여기는 이상하게 더더욱 파편화된다. 언제나 일정한 콘텐츠를 내놓는 사람은 정말 드물고, 그때그때의 플로우에 맞추어 알맞는 쓰레기를 내놓는다. 월요일에 한 말과 금요일에 한 말이 완전히 반대되더라도 쓰레기 내놓는 날만 잘 맞춘다면 어쨌든 괜찮다. 셋째는 쓰레기 간의 환전불가능함이다. 누군가 쓰레기의 가치를 찾아내도 그것은 찾아낸 지역의 고유 화폐다. 게토 바깥에서는 환전되지 않는다. 게토 바깥 쓰레기의 유일한 소용은 똥 닦는 휴지 그러니까 인용알티/캡처박제 정도다.
여태 게토라고 말하던 것을 공중화장실로 생각해보자. 이 공중화장실은 같은 쓰레기상하수도를 공유하는 개인화장실의 집합이다. 아무래도 트위터에서 지금 가장 공고한 것은 이 공중화장실인 거 같다. 십중팔구는 이 공중화장실에 정착하며 부적절한 쓰레기가 들어올 틈을 벽돌로 막는 것만이 지속적인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트위터를 떠나는 일을 제외하면) 방법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 뿐 그저 투병 기간을 연장시키는 역할인 거 같지만, 역시 최선은 최선이다.
그곳이 종착역이다. 트위터라는 무한 쓰레기장에 처음 입장한 사람들은 저딴에는 반짝이는 파편들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다니거나, 그 조각을 새둥지처럼 모아 자신의 거처를 만든다. 그리고 거처 바깥은 위험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거처 안에서 똥을 싼다. 쓰레기를 모아와서 똥을 닦아 다시 쓰레기를 버린다. 그러니 그곳은 화장실이다. 집이 화장실이 된 게 아니라 화장실을 집삼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화장실이 어느 순간 이 공중화장실의 일부라는 것에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끼는 듯하다.
물론 화장실도 깨끗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 머문 자리는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계속 똥을 싸고 있다면? 또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게 사실 머무른 다음에나 판단되는 거라면? 그러니까, 떠나질 않는다면? 심지어는 화장실이 공개되어 있어 아무나 머물러 똥을 쌀 수 있다면? 그걸 실질적으로 치울 수 없다면? 그러고도 여전히 내가 화장실에 산다면? 뭐... 싸면서 동시에 어떻게 치울 방법이 있긴 한가?
결국 쓰레기는 집적된다. 그게 끔찍하다면 화장실에 살지 않거나 또는 살아서 화장실에 있지 않는 방법, 또는 출입을 통제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사전예방이지 사후처리는 아니다. 읽은 글은 안 읽어질 수 없다.
치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하다. 트위터는 화장실들이 모인 아주 커다란 쓰레기장이고, 처리하는 방법은 사실 여태까지의 경험상 한 가지 뿐이었다.
모든 지면이 새로운 쓰레기로 완전히 덮이는 것이다.
그동안 트위터에서 나 또는 우리는 아주 많은 주제와 집단과 인물과 사건과 시간을 소비했는데, 그것들은 데이터 지층 아래에 깔려 있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친 것 같기는 하다.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많이들 알다시피 새로 쌓이는 말들 아래로 파고드는 건, 그런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하나하나 따지고 반송하는 일은, 매우 무효하고 헛된 일이었다. 지나간 일들은 복권되지 않았고 개중에는 여러 모로 옳았던 일, 옳았지만 아쉬웠던 일, 안타깝고 잘못됐던 일도 있었고 완전히 망한 일도 있었다. 완전히 망한 일들을 되살리는 일, 실패해서 바닥에서 처박힌 걸 끄집어내려는 일들은 또 실패했다. 그런 일을 집어내려 했다는 일조차 다시 묻혀서 아무도 기억하질 못했다.
나는 쓰레기에 묻혀서 다 망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안 그랬다. 그냥.... 묻힌 곳이 다시 지반이 됐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장 위쪽에 떠 있다. 물이 얼마나 깊든지 언제나 수면으로 떠오르는 플라스틱 쓰레기처럼. 게다가 신기하게도 완전히 망했던 일들이 덜 망한 일이 되어 되돌아오거나 아예 망하지 않게 되기도 했다. 똥 묻은 쓰레기들이 새로운 쓰레기들에 모래 필터처럼 정수되어서, 똑같은 쓰레기를 봐도, 옛날에 누가 그걸로 똥을 닦았다는 것조차 아무도 알아차리질 못했다. 이 아래에 뭐가 있다는 것조차 기억을 못했다.
물론 그와 얽힌 많은 시도들도 함께 잊혔고 똥조각이 남거나 다시 똥을 싸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시간이 흘렀고 그게 다 희석돼 버렸다.
이게 뭐람? 영원할 줄 알았던 일들도 그냥 쓰레기1이 됐다. 상당히 허무한 결과였다. 심지어 반복되기까지 했다. 마치 고대 사회에서 매 절기마다 치르는 행사를 우주의 탄생과 파멸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산을 떤 것이다. 그저 거기에 불행하게도 제물로 바쳐지고 땔감으로 바쳐진(또는 땔감이 되기를 자청한)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게 우주의 순환의 일부였다니?
여기까지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 나보다 훨씬 오래 머문 사람들도 있는데, 왜 저 사람들은 이걸 그렇게 열심히 하나? 이 모든 걸 봐놓고도 어떻게 매번 똑같을 수가 있을까? 더 단단해지거나 닳아 없어지거나 한다는 징후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들은 무엇을 목적하기에 같은 상태를 고수하는 걸까? 또는 무엇을 성취하려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저들은 왜 저리 열심히 쓰레기를 버리고 흐름에 매달리나?
어쩌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해리 포터에 나오는 모우닝 머틀은 여자화장실에서 죽은 유령이다. 그 유령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지만 죽음의 순간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고, 죽은 뒤로 지식이나 감정을 크게 변화할 수 없다. 또한 롤링이 딱히 설정해놓지 않았는지, 사후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는 표현이나 암시도 등장하지 않는다. 성불하지 못하는 유령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모우닝 머틀은 울고 비명 지른다. 억울하고 분노스러우니까. 언제까지? 누구도 고통의 할당량을 설정해놓지 않았다.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 한계도 없고 동기도 충분하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모우닝 머틀이 있고, 그들의 불행은 모두 동일하게 환원되므로 그들의 울음에 반향되듯 또 울어야 하니까. 모든 머틀이 울어야 할 이유가 된다.
무한한 여자화장실에는 무한한 모우닝 머틀이 있다. 그들은 자기 화장실을 유지한다. 스스로 어떤 시간과 상태에 고정시키고 모든 쓰레기를 똑같이 대한다. 내용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형식과 출처를 구분한다. 이것은 적합한 울음인가 아닌까? 이미 울고 있기에 울음의 방향만 정하는 과정이고 방향은 항상 흐름에 맞춰진다. 다행히도, 이미 죽었기 때문에, 적어도 두 번 죽을 일은 없다.
하지만 고통이 끝나지는 않는 거 같다.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블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트위터를 떠날 수 없다면 그냥 게토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걸 부수자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한 거 같으니까.
게토는 쉽다. 게토에 정합되는 올바른 일과 그 바깥의 나쁜 일들로 모든 쓰레기가 분류된다. 게토 바깥의 모두가 나쁜 행위들을 하기에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게토를 강화한다.
무한 쓰레기장은 제어 불가능하고, 플로우는 최대 하루에 세번에서 최소 일주일의 세번씩은 바뀌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보다 작은 공중화장실에서 흐름을 견딘다. 이곳은 관습법 같은 방식으로 어느 정도 제어가 된다.
너무 거대한 것은 나와 하나될 수 없다. 나는 소모되는 세포 하나다.
좀 더 조그만 공간에서는 팔이나 다리 정도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책임이나 의무 같은 게 재생되어버린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뛰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엔 화장실에 있기 위해 화장실에 있는 화장실의 유령이 된다.
유령들은 계속 고통을 찾아 다닌다. 유령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유령이 편가르기를 시작한다면 영원히 쓰레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 쓰레기가 고통스럽다고 해도 현재로서는 도저히 없앨 방법도 제어할 방법도 없다. 고통을 줄이려면, 지금 가능한 방식은 화장실을 만들고 철저하게 상수도를 관리하는 일 뿐 거 같다. 블락을 최대한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
무한한 쓰레기장과 자폐된 화장실. 겹쳐진 두 공간을 하나의 몸으로 살아낼 수 있을까? 정신은 어떻게 될까? 이 제자리뛰기는 직관과 습관과 인격 형성의 원인일까 결과일까?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2017년 7월 6일 목요일

미지살해일지 (공개용)


























































 마음 다잡고 2월에 캡처를 진행했는데, 사건 당시에 봤던 글들 여러 개가 날아간 걸 봤다. 트청을 했거나 뭐 그런 거겠죠. 본인들은 그렇게 수시로 발언들을 철회하고 지우면서 타인에게는 대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겁니까?
 이 글을 올리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자혜의 글 세 가지 버전이 모두 유출됨에 따라 그동안의 신중함이 물거품이 되었고, 차라리 이 글을 남겨두는 것보단 올려두는 게 낫다는 판단 하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