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5일 목요일

~케모너 소고~ 수인러에 대한 단상


(걍 가볍게 써서 출처는 제목만 달았음)


1. 수인러의 심적 기원
2. 수인 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의 장점
3. 남성성과 수인
4. 수인과 환상성
5. 정리
 
 
1. 수인러의 심적 기원
 
수인러의 시작은 17천 년 전으로 올라간다.
 
……라고 말하면 조금 어리둥절할 것이다. 17천 전 존잘님이 수인을 연성 중이라니, 당시에 연성이라고 해봤자 양면석기가 아니었는가. 양면석기 온리전이 열리고 있을 시대에 수인러가 등장했다니? 그러나 실제로 수인은, 오히려 인간보다도 먼저 그려지고 있었다. 다음은 프랑스 남부의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와 그 원본을 추측한 스케치이다.
추측 복원도
 
라스코 동굴 벽화 원본



 
손과 발, 성기와 동시에 사슴뿔, 꼬리가 보인다. 뿔 부분에서 학자마다 의견이 갈리고 있는 듯하나 이 글에서는 일단 수인으로 가정하겠다.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 보이는 인간의 모습도 인간이라고 보기엔 조금 이상하다.








조금 새 인간 같지 않나……? 좌측에 새가 그려져서 잘못 유추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인간의 초상이라고 보기엔 조금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옆에 있는 소에 비해서 훨씬 정밀도가 떨어진다.
당시 그림러들의 실력이 미천해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오래된 쇼베 동굴의 벽화(BC 30,000년 추정)를 보면 당시 존잘들의 실력을 파악할 수 있다.



~3만 년 전 존잘님들의 연성~
 
동굴 벽화에서 드러나는 색채 감각이나 세세함, 원근법 등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실력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인간을, 특히 인간의 얼굴을 그리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터부였을 것이다.
동물들의 그림이 많이 그려지고 있을 때, 인간의 얼굴이 그려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빈 얼굴의 자리에 동물의 얼굴이 채워졌다면, 최초의 수인이 그려졌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렇게 보인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됐을까?
 
벤야민은 이 인간의 얼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제의가치는 최후의 보루로 물러서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 마지막 보루가 바로 인간의 얼굴이다.’(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라고 말한다. 직립보행이 인간종의 판단 기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굴에서 가장 인간을 찾는다. 우리는 인간의 초상을 바라보며 실재하는 인간의 존재를 어느 정도 느낀다. 초상은 부분적으로 살아 있는존재로서, ‘현실로서 다가온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타인이 기본적으로 불편한 존재라고 볼 때, 초상에 살아 있는 타인은 바라보는 그를 불편하게 만든다. 살아 있는 초상화 괴담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많다. 인간의 초상은 타인이 바라보는 것 같은 그 묘한 느낌을 간직한다.
수인은 이 인간의 초상이 부여되지 않은 존재다. 수인은 인간이지만, 인간의 초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래서 네코미미는 수인이 아니다.) 인간의 초상이 박탈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수인은 시작된다.

~~
 
 
2. 수인 인간도 동물도 아닌 존재의 장점
 
수인은 인간의 초상을 지니지 않았으나, 보통 인간의 몸과 인간의 정신을 가진다. 그러나 또 하나 가지는 것이 있는데, 바로 동물의 얼굴이다. 당연히 수인이니까 동물의 얼굴을 가진다. 그게 왜?
동물은 어느 정도는 타자가 아니다. 특히 위험한 동물을 마주치기 힘든 이 시대에서는 더더욱, 동물은 오로지 애정을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 동물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 동물은 당신을 속여 이득을 취하지 않는다. 동물은 당신이 마음을 놓아도 좋은 존재다. 동물은 당신을 사랑한다. 개념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러한 점 때문에 사람들은 동물을 좋아한다. 특히 아이들이 그렇다. 모든 디즈니 영화에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소동물이 나온다. 아이들은 그 소동물에 자신을 이입하기도 하고, 애정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조금 시니컬하게 보자면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위계가 있다. 어린아이의 격 이하인 것은 그 친구들이나 애완동물뿐이다. 동물은 어느 정도 안전하다. 정서적으로 고립된 사람에게 동물 기르기를 추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마음을 열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타자도 아니고 완전히 동일시되는 것도 아닌, 세미 타자 세미 주체…… 정도일 것이다. 영화에서 동물이 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이며 포켓몬이 행위적으론 노예임에도 진실한 정서적 교류라고 믿게끔 하는 동력도 이 덕분일 것이다.
수인은 바로 이런 동물의 얼굴을 가져온다. 동시에 인간의 몸과 인간의 지능을 지닌다. 즉 이들은 동물의 얼굴, 즉 동물의 마음과 인간의 능력(혹은 인간보다 더 우월한 능력)이 있다. 수인은 동물이 할 수 없는 역할까지 가능하다. 수인은 인간을 완전히, 심지어는 더욱 낫게 대체할 수 있다.
 
3. 남성성과 수인
 
그리하여 수인이 할 수 있게 된 행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섹스-특히 게이 섹스에 초점을 맞춰본다.
수인러 중에선 14-25%가 호모섹슈얼, 37-52%가 바이섹슈얼, 28-51%가 헤테로섹슈얼, 3-8%가 다른 섹슈얼리티를 가진다고 한다. 그중 반 정도가 연애 관계에 있었고, 그중 76%는 같은 수인러와 사귀는 중이라 했다. 또 다른 설문에서는 수인러 활동에서 성적 끌림이 얼마나 중요하냐 물었는데, 37%는 중요하다고 응답했고, 38%는 양가적(ambivalent)이라고 했으며, 24%는 적거나 전혀 관계없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이 중 80%는 남자다. (영문 위키 furry fandom 출처)
뭉뚱그려서 수인러의 80%는 남성애자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퍼리는 어째서 게이를 유혹하는가? 그것은 동물의 특징과 남성성의 특징이 일부 겹치기 때문이다. , 야생성, 힘 등 퍼리는 많은 남성적 상징을 가지고 있다.
 
많은 수인이 털을 지닌다. 털은 보통 남성성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턱수염과 콧수염에 대한 성적 매력은 익히 알려진 바 있다. 대표적으로 링컨이 당선될 때 콧수염을 길러보라는 조언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온몸에 털이 자라난 남성이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상상하기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어렵다. 실제로 남성호르몬이 털을 자라게 하기도 하며, 아마도 털이 성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이것이 일차적인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상징적으로도 조금 파고들어 보자.
 
크고, 털이 많고, 힘센 것은 대형 동물의 특징인 동시에, 남성성이 탈취한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특히 대형 포유류는 남성성을 지닌다. 대표적으로 곰을 예로 들 수 있다.
미셸 파스투로는 곰에 얽힌 수많은 반인반수설화를 말하는데, 보통 여성을 납치하여 가둬놓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내용이 많다. 그는 덴마크 왕조의 탄생설화, 기독교의 곰 고기 금지(“그것은 사람을 흥분시키고 죄로 몰아가 죽음을 일으키는 불순한 고기이다.”), 발 데 아르당(bal des ardants) 사건, 중세 결혼식의 동물 짝짓기 등을 예로 들며 극한의 야성과 강력한 성욕의 상징이라 말한다. 그는 털복숭이인 것이 성적인 것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미셀 파스투로, , 몰락한 왕의 역사) (하지만 이 예시는 반례도 꽤 있다. 한국 설화에서도 곰이 납치해 아이를 낳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곰이 여성이고 인간이 남성이다. 그리고 웅녀도. 아르테미스 역시 곰의 여신이며 큰곰자리의 칼리스토도 어머니다. 물론, 전부 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는 하다.)

중요한 건 곰뿐만 아니라 많은 털동물이 성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의 판이나 켄타우로스도 그 인식의 결과이다. 그들은 털이 있기에 옷을 입지 않는다. 그들은 정욕을 느끼면 행한다. 특히 가축은 옷도 입지 않고, 인간처럼 숨어서 교미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동물은 성적인 상징으로 그려지고, 이 상징성, 성적 야생성을 매개로 인간에게도 흘러들어온다.

그리하여 수인이 섹스하는 건 어딘지 자연스럽다. 특히 발정기에 관련된 설정이 그렇다. 이것은 오메가버스에 등장하는 히트 사이클의 원조격이다. 털로 뒤덮인 동물은 본능에 맡기고 성욕을 발산하는 게 허락된다. 인간에게는 배덕적인 요소다.

이 기초적인 조건이 갖춰진 뒤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남성성의 정도는 옵션을 추가할 때마다 아비꼬 카레 매운맛 고르듯 높일 수 있다. 근육이 많거나, 몸집이 크거나, 힘이 세거나, 거근을 지녔다거나, 바람둥이라거나, 섹스광이라거나. 그러나 앞서 말한 동물의 얼굴때문에, 위험한 남성성은 거세되는 경우가 꽤 있다. (Yiff 중에 고어하고 그로테스크한 것만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뭐라 코멘트는 못하겠다.) (이것은 5에서 언급하게될 수인의 안전성과 관련되는 문제다.)
 
위의 특질들은 게이 아트에서 주로 다뤄지는 것이기도 하다. 수인은 남성성을 자연스럽게 적용시키기에 적합한 존재이며, 게이들이 이에 끌리는 것은 운명이다....... (난 아님)
 
그런데 여기까지 오면 의문점이 생긴다. 파충류 수인도 있지 않나? 특히 드래고니안 같은 것들. 그것들은 위의 것으론 설명할 수 없지 않나? 그렇다. 그것은 털이 없는 수인이다. 대신 그들은 다른 장점을 지닌다.
 
4. 수인과 환상성
 
파충류 수인이라고 하지만 특히 드래곤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가정하고 시작하겠다.
드래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환상 그 자체다. 판타지 장르와 드래곤은 떼기 힘든 관계다. 신화에서부터 톨킨까지, 톨킨에서 현대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줄곧 드래곤은 환상 세계의 대표적 상징이다.
그러므로 드래곤 수인은 이중의 안전망을 가진다. 동물의 얼굴에 더해서 드래곤이라는 환상이 더해진다. 긴 수명, 강한 힘, 신비한 능력까지 더해지므로 캐릭터적 매력도 증가되기도 하고. 환상의 존재라는 사실은 그것을 다루는 데 있어서 자유를 준다(마음대로 설정해도 되고, 막 대해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사실 수인은 한 가지 안전망이 더 있다. 그것은, furry건 케모너건 수인러건, 어느 정도 아니메-망가 그림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실제에 가깝게 그리는 경우는 잘 없고, 있어도 소수다. 대부분은 큰 눈을 지닌 귀여운 얼굴의, 데포르메가 일어난 형태다. 이 역시 현실에서 수인 세계를 한 발짝 더 떼어놓는 역할을 한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여기에 수인 자캐가 들어간다. 95%의 수인러들이 수인 자캐를 만든다고 한다. 고정된 한 개의 자캐만 만드는 경우가 절반에 가까우며, 상대적으로 여러 개의 ‘fursona’를 만드는 경우는 매우 적다. (영문 위키에서... 한국은 어떤지 모름)
자캐는 나지만 내가 아니다. 나의 생각과 의지를 체현하지만 특성은 공유하지 않는다. 잘나게 그릴 수도, 못나게 그릴 수도 있다. 아파도 자캐가 아프지 내가 아픈 건 아니다. 그러나 자캐가 수인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나는 수인 세계에 존재하게 된다. 자캐는 현실에서 두세 겹이나 떨어진 수인의 세계를 쉽고 안전하게 이어준다.
 
이중 삼중 사중의 안전망을 가진 수인러는 이렇게 형성된다고 본다.
 
5. 정리
 
수인은 그러니까, 특히 (남성인) 남성애자의, 안전한 문화가 된다. 이것은 동물에서 기원하는 신화적 존재의 격세 유전격 자손이라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아니메 오타쿠와 생태학적 위치를 같이하는 수렴진화, 상사기관의 관계……로 보인다. 수인러와 오타쿠의 관계는 사실 분리하기 힘들다. ‘퍼리 팬덤의 21%는 브로니, 44%는 아니메 팬이고 11%만 스포츠 팬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75%의 퍼리 팬덤이 25살 이하, 88%의 퍼리 팬덤이 30살 이하라고 조사됐다.(영문 위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거 같다.
 
수인러가 가지는 특수성도 꽤 짙다. 80%가 퀴어고, 80%가 남자이며, 50% 이상이 실제로 수인 또는 동물이 될 수 있다면 되고 싶다고 응답하며, 코스튬을 입고 실제로 수인 롤플레잉을 하는 등 여러 가지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다. , 다른 오타쿠-팬덤에서도 비슷한 비율일 것 같기는 하지만, 퍼리는 특히 섹슈얼과 가깝기에 조금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부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칭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합의가 없다. 독자적인 퀴어로 정의하려는 사람들도 있고(퀴퍼에 참가하려고 했던 걸로 기억한다), 수인러가 독자적 성 정체성이라는 게 말도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존재는 정말 실재할 수 없는 것들이고, 그것이 실재하는 대상과의 관계인 기존 섹슈얼리티 체계에 들어갈 수 있을까, 없을까? 상상 속에서, 매체 속에서만 가능하다면 무성애 카테고리 안으로 봐야 할 거 같은데(나는 나르시시즘도 무성애라 생각한다)(이는 정체성 소고에서 성직자를 예시로 든 것과 비슷하다). 만약 가능하다면 매우 문화에 종속적으로 생성된 섹슈얼 아이덴티티라는 점에서, 흥미롭기는 하다.
 
그러나 수인러가 아닌 관계로 여기서 마친다. (번역해서 퍼리들한테 좀 물어보고 싶다....)
 

2016년 11월 8일 화요일

정체성 소고2 - 안드로이드가 돼도 정체성의 꿈을 꿀까? ex utero yet.


1. 이조 님께
2. 출발점?
2-1. 단어 정의
2-2. 출발점.
3. 생물적 본질주의?
4. 사회적 구성?
5. 나머지
6. 결론
 
1. 이조 님께
 
먼저, 감사합니다. 논의 활성화도 이루어졌고(착각인가요?), 비판에 대해 부정적 여론도 있지만 저는 어느 정도는 유의미하다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말하려고 했던 부분이 일부 있었고 설명이 다소 미흡했던 부분도 있었구나 싶었거든요. 그리고 저는 <정체성 소고>를 쓰면서 에이섹슈얼과 이야기를 꼭 나눠보고 싶었기 때문에(본의 아니게 에이섹슈얼에 대해서 많이 걸고 넘어져야 했던 필요성 때문에) 어느 정도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구요. 또 글에 일정 정도로 형식성을 갖춰 자세히 피드백이 올라오는 것은 어쨌거나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방법론에서 큰 차이가 있고, 이것은 합의된다기보다 설명되어야 하는 종류라고 봅니다. , 맥락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굳이 시작을 그때 거기로 잡는 것은 편집자의 시각이고, 저는 제 시각을 쓴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말하는 게이라는 것을 사회적 정체성으로 읽어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죠. 발언의 삭제, 제가 보기엔 맥락의 시작으로 적절해 보입니다.
 
이조 님의 주장에서 가장 핵심은 여전히 성 지향성과 성적 정체성의 구분은 옳지 않다입니다. 기존 주장과 다른 점이라면 성 지향성 역시 구성된다는 점이겠죠. 그 근거로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환원되는 것이 옳지 않다, 권위주의적 억압 방식에 의존적이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고로 저는 왜 성 지향성을 굳이 성적 정체성과 나누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우리는 무에서 창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고, 저는 우리가 아직까지는 생물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 본질주의라기보단 생물적 본질주의라고 해도 무방하겠네요. 오히려 이것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에이-생물적 본질주의라고 불러야 하나 싶을 정도로요.
 
저는 그것이 퀴어 이야기 이전에 전제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퀴어 이야기를 넘어서 주제가 이리저리 건너뛰지만, 제가 하려는 말은 하나겠죠. 성 지향성 정체성과 성 정체성(성 사회적 정체성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네요)은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 말해두자면, 인용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는 것 위주라서 제 해석대로 씁니다. 아무나 정정해주셔도 됨. 그리고 저 과학자 아니라 오개념 많을 거 같아서 좀 무서운데 일단 씀.)
 
아무튼, 합의에 대한 개념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2. 출발점?
 
푸코-그리고 이조 님-가 성 지향성; 즉 끌림, 역시 조성된다고 한 것은 우리가 그런 사회적 억압(압력)을 받았기 때문에 한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득적으로 무언가를 갖고 태어나는지, 사회적 존재기 때문에 알 수 없다.”, “결국 성 지향성 역시 구성된 것일 텐데 그것을 어떻게 "생득적"이라 말할 수 있느냐.” 라고 죽은 푸코가 말했겠죠. 이것은 사실상 제논의 역설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것이 앎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앎에 의한 앎이 실제 세계를 반영하는가, 영향을 주는가? 앎을 계속해도 결국 실제와는 차이가 나지 않는가? 새로운 대체재에 불과하지 않은가? (아마 신체에 대해서는 남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일단 이조 님이 인용한 부분은 이렇게 읽히네요.)
 
이것은 우리는 성 지향성을 갖고 있든 없든, 머리로 알고 있다 해도 사회적 무균실에 떨어뜨려 놓지 않는 한-또는, 그 무균실조차도 사회적 조성임을 감안하면-알 수 없다”, 는 고르기아스적 주장일까요? 아니면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적인 걸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본인이 죽는다는 사실을 수 있나요? 우리가 생물이기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영원히 인지할 수는 없죠. 그러나 타자를 통해서, 알 수 있죠. 현상은 일어나고 이것은 거시적인 것입니다. 미시적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거시적 현상에 어떻게든 접근할 수는 있죠. 누군가가 전하가 움직이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형광등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는 건 알 수 있겠죠.
 
과학은 가치가 없을까요? 그것은 말씀대로, 권력에 의한 억압적 지식 체계에 불과할까요? 권위주의의 산물일까요? 저는 과학은 가장 나은 대안을 추구하는 방식이고 그것은 권위를 가진 것을 부수며 변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원리의 제시라기보단 현상에 대한 해석의 방식이라 생각하지만요. 그러나 말씀대로 그것은 (성경만큼이나 신화적인) 권위일까요?
 
예시로 계속 언급하셨던 생물학을 말하자면, 생물학은 과연 억압적이고 권위적이어서 의존하기엔 너무 파시즘적일까요?
 
 
2-1. 단어 정의
생물학에서는 ''의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렇게나 권위적·억압적인 개념, 권력인가요?
종의 개념만 해도 생물학적 종(교배-생식 가능 종), 형태학적 종, 계통발생학적 종, 생태학적 종······등이 있습니다. 생물학적 종조차 윤상종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1번 아종과 2번 아종, 2번 아종과 3번 아종······6번까지는 교잡한 2세가 생식 가능하나, 1번과 6번이 교잡시엔 생식 불가능한 종이 나오는 이상한 애들입니다. 얘네를 하나의 종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학자마다 다를 겁니다.
종의 개념에 대한 합의조차 안 된다면, 그렇다면 이들은 이론을 어떻게 제시하느냐? 앞에 내가 어떤 개념을 쓰겠다고 정의를 하겠죠. 자연과학으로 분류되는 생물학이 이런데 문학이나 사회학은, 아니 그냥 어떤 글이든 간에, 앞에서 이 단어를 이하 이런 의미로 쓰겠다라고 하면-그것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동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학술적으로도 없는 상황때문에 불가하다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그게 훨씬 권위주의적이지 않은지······? 적어도 그 글의 문맥 하에서는 그렇게 읽어주는 게 맞을 테고요.
저는 '게이'에 대해 '사회적 정체성'으로 봐달라고 정의·요구했고, 이것을 무시하고 '성적 지향성'으로 읽은 것은 그들의 착각이겠죠. 고로, 1번 항목에 대한 답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2. 출발점.
우리는 최소한의 합의가 필요할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님이 말하는 것조차 하나의 '귄워주의에 기댄 아무말'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님의 글에서는 그러한 합의점이나 기반이 도출/제시되지 않았고, 결국 모든 것은 "nay, nay, nay"로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1+1=2의 증명과 코기토를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게 됐죠.
원래 하려던 얘기긴 했는데, 정리된 건 아니지만 풀어봐야겠네요.
 
 
3. 생물적 본질주의?
 
우리에게는 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며, 설마 이것을 부정하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우리 몸은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하시리라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에게 "본능"이 존재하는가?”의 영역은 다시 위의 문제로 넘어가죠. 구체적으로, 성적 지향성이라는 게 본능으로서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사회적 조성인가?
저는 생물이 자기보존 욕구를 가진 분자체라는 점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게 없는 생물은 이미 죽었고-우리는 살아남았으니까 이것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보존의 일환으로 음식을 먹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겠죠(아닌가요)?
음식을 먹는 것에서의 사회적 조성은, 어느 사회는 아침으로 시리얼을 먹고 어느 사회는 된장국과 밥을 먹는 차이일 겁니다. 그 사회가 아침으로 뭘 먹느냐는 전적으로 사회적 조성에 달린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보편적으로 탄수화물과 지방과 단백질 따위의 영양분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고양이처럼 단맛을 느낄 수 없다면 우리의 식단에서 탄수화물은 대단히 많이 줄어들지 않았을까요(물론 알 수 없겠죠)? 어찌 됐든 우리는 기본적으로 탄수화물, 지방, 단백질 따위를 좋아하도록 진화했습니다. 이 기반 위에 사회적 조성과, 개체 차이가 쌓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물론 알 수 없겠죠). 기반은 거시적 영역이고, 사회적 조성과 개체 차이는 미시적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거시적 영역은 다른 생물들과도 공유하는 부분이기 때문에(즉 비교 대상이 많기에), 저는 거시적 영역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성적 지향성에 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 그것은 사회적 조성일까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퀴어 이론은 헤테로섹슈얼을 건너뛰나요? 우리가 유성생식을 하는 척추동물의 한 가지 끝에 있다는 것은 "권위주의적 구라"로 취급되나요? 우리의 몸이 지어질 때 우리는 분명 그 도구들을 사용해 지어졌을 텐데요.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섹스를 가진, 유성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며,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의 뇌는 그러한 존재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몸으로 태어났을 텐데요. 이것이 사용되는지 안 되는지, 개개인이 어떻게 구비·배치되어 있는지는 그다음의 문제가 아닌가요? 우리가 단위생식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저는 원래 이 글 뒤에 정체성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으며, 그 글의 근본적 아이디어는 정체성이 결국 몸으로 엮인다는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생물의 몸을 가지고 생물의 뇌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이 몸을 떠날 때-타인에게든, 책으로든, 랜선으로든-그것은 새로운 정체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우리는 몸의 한계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성 지향성이 온전히 인공적으로 조성되려면 우리는 전뇌 존재가 되거나, 로봇 몸을 얻고 재프로그래밍 되거나, 유전적 조작을 통해-그것이 가능하다면-조성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트랜스휴머니즘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 보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몸이 다른 몸과 고립되어 있으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그에 실질적 고통을 느끼는 존재 아닌가요? 우리는 타인의 몸을 그리는 몸이 아닌가요? 누군가가 자신이 몸이라는 걸 부정한다면, 영혼인가요? 전뇌공간의 정령인가요? 그렇다면 그가 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할 자격이 있나요?
 
제 생각엔 성 지향성이 인공조성이라고 하며 헤테로섹슈얼을 인공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것은 다른 섹슈얼을 인공의 영역으로 제안한 뒤 헤테로섹슈얼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헤테로섹슈얼에게는 물론이고 다른 섹슈얼리티에도 부당한 거 같습니다.
저는 진화심리학을 생각합니다. 피부가 깨끗한 사람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건 단순히 그냥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순환논리가 아니라, 병에 걸리지 않았단 증거로서 긍정적 반응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을 염두에 둡니다. 그것은 '발단'이며, 발단 이후에 나온 현상은 다시 그다음 현상의 발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개념의 생성 이후에서야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가능할 수도 있게 되는 겁니다. 즉 생득적인 것과 자기 인식, 존재 연속은 그렇게 상호작용을 합니다.
 
최초의 생득적인 것은 사회와 구성되서 다시 존재 연속 안에 포섭됩니다. 반쯤 재미로 도식화 해보자면,
 
생득+인식+사회 = 존재 연속
존재 연속(생득+인식+사회)+인식+사회 = 존재 연속2
존재 연속2(존재 연속(생득+인식+사회))+인식+사회 = 존재 연속3······의 식이 될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오타쿠가 되거나 막시스트가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결과일 것이며, 여기서 생득된 것의 영향력을 적게 놓느냐 많이 놓느냐는 "알 수 없"겠죠. 사회적인 영향력은 내 존재 연속에 영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요. 하지만 정말로 모든 것이 사회적인 조성일까요? 예를 들어, 여자와 남자는 오로지 사회적인 영향력에 의해서만 차이가 날까요? 그렇다면 호르몬이나 근육량의 차이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을까요(그럼 호르몬 요법이나 운동은 왜 할까요)? 그것이 최초에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조작 가능한 도구를 하나 더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힘이 아는 것이 되는 것은 이 상황의 인과관계이며, 선후파악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파악이 됐기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이것을 의지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며-"과학"하게 되는 것 아닌지.
 
저는 생득적인 차이가 개개인에게 존재한다고 여기기에, 같은 사회적 조건에서도 개개인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성적 지향성 역시 그 생득적인 차이에 포함된다고 보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생득적이지 않다"는 것 역시 하나의 의견이며, 이것 역시 "합의된 방법론"에 의해 연구되어야 근거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권위주의를 문제시 삼으면서 다른 권위를 가지고 오는 것은 솔직히 당혹스럽습니다. 모든 게 권위적이라 여긴다면 결국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일기장? 우리 모두가 헨리 다거일 뿐이라 주장하는 걸까요? 그것은 무엇에 기반한 주장일까요? 그것이 반박불가능한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절대권력"의 사전적인 정의에 가까운 것 아닌가요?
 
 
4. 사회적 구성?
 
성적 지향성에 생득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난 뒤에야,
성적 지향성 정체성과 (사회적) 정체성이 구분되고 (우리가 가진 사회적인 틀의 한계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지향성이 탐구되어야 할 것이라면 정체성은 행동해야 한다는 점에서. 생득+인식과 인식+행동의 차이로서.)
그 둘이 내적 정체성(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 선언)외적 정체성(사회에 대한 정체성 선언)으로서 기능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은, 여전히, 존재 연속과 내적 인식이 있다는 점입니다. 성적 지향성에 생득적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은 성적 지향성 정체성이 온전히 생득적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정체성 소고>에서 이것이 <존재 연속에 의한 내적 인식>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내적 인식은 내게 사회적 외연이 있을 때 생기거나, 그냥 깨달을 수도 있는 거고요. (개인이 무언가를 깨닫는 과정은 다분히 미시적입니다.) 성적 지향성 정체성은 인식하는 것에서,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으로서 더이상 이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가 이에 기반해 자신이 XX섹슈얼이라 생각하면 우리가 더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정체성은 다릅니다.
 
내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남에게 말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발화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특정한 생각을 주기 위함입니다. 바이섹슈얼, 이라고 말하는 것과 게이, 라고 말하는 것과 바이섹슈얼 게이, 라고 말하는 것은 각각 분명히 다른 정보를 줍니다. 왜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것은 <게이 커뮤니티>라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인식-또는 체험이 없을 경우, 또다시 미궁으로 빠집니다.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합니다.
 
<게이>의 사회적 정체성은 <게이>가 소수자성을 지니며,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정체성을 지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음식물을 섭취하는 사람은 정체성이 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차이가 나거나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밥을 먹는 사람의 경우 빵을 먹는 사람과 대비됩니다. <게이>가 어느 정도까지는 배타적이지 않게 될 때까지, 아마 계속해서 정체화를 강하게 요구할 것입니다.
제가 <게이>를 굳이 붙여 말하는 것은 아직은 <게이> 사회 안에서 호모섹슈얼 행위가 이루어지기 훨씬 쉽고, 저처럼 상대방에게 숨기고 싶은 게 없다면, “내가 바이섹슈얼이며,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행동을 한다는 점을 상대방에게 인지시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게이 커뮤니티는 성 기반으로 뭉친 사회지만, 그 자체로 일종의 (배타적) 사회 공동체이며 그렇기에 사회적 정체성이 생깁니다.
(<정체성 소고>에서 헤테로의 일반인이라는 발화 안에 시스젠더 헤테로라는 정체성이 숨어 있다고 했는데, 여전히 성적지향/성별/성 정체성은 있으나 이것은 사회적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은 다소 약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미흡했습니다.)
제가 <게이> 사회에 <바이섹슈얼>로서 속한다면 당연히 <바이섹슈얼 게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닌지? 이것은 행위와 수행에 대한 내용이 맞습니다. 그리고 사실, “G에 가까운 B”라는 말도 행위 수행적으로 본다면 그렇게 틀릴 건 없습니다. 왜냐면 바이, 게이, 헤테로를 칼로 뚝뚝 자르는 건 인위적인 구분이니까요.
 
거꾸로 생각해봅시다. 헤테로와 호모, 바이는 왜 모두 분리되어야 할까요? 이미 여기서 사람들이 생득적인, 엄격한 구분을 상정해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정체성의 유동성’(ㅋㅋ)을 인정할 경우-비정상성과 정상성으로 구분이 이루어지던 시대의 기준에서는 호모섹슈얼을 헤테로섹슈얼로 바꾸려는 압력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서 바이섹슈얼은 이 압력의 시험을 가장 강하게 받았을 테고, “둘 다 수행 가능하다는 특성 때문에양쪽으로 갈라지거나, 바이섹슈얼이라는 독립적 섹슈얼리티 가시화를 위해 분리를 주장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생물 종의 구분조차 인위적이라면 당연히 섹슈얼리티의 구분 역시 인위적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노섹슈얼리티 담론"은 이것이 인위적이라는 것을 지적한 첫 부분에서 이미 부정했다고 생각했는데, 근본이 되는 논리가 더 필요한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퀴어, 이 이상한queer 사람들이 정상-비정상이 아니라 다수-소수로 나누어질 뿐이라면, 바이섹슈얼이-또는 그 어떤 섹슈얼이든 굳이 집단을 형성해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저 상황(바꾸려는 압력이 없을 경우)을 가정해본다면, 바이섹슈얼은 굳이 독립적이어야 할까요? 정말로 그것은 삭제되는 것일까요? 물론 이건 현재 상황에 맞는 이야기는 아니고 좀 미래의 이야기지만요. 아직도 바이섹슈얼에게 헤테로와 호모, 그것이 문제이니 선택하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서는요.
 
그러나 집단이 부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제가 게이 커뮤니티에 더 동질감을 느낀다는 점에서, 저는 바이섹슈얼 게이라고 저를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타인이 영향을 받는다-지워진다······ 저를 공격을 하는 것도 뭐 일종의 가시화방법이겠네요 ㅋㅋㅋ. 그러나 <정체성 소고>에서도 말했지만, 보다 덜 배타적인 방법으로 구성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5. 나머지.
 
5-1.
[일단, 여성 혐오의 혐오와의 비유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여성 혐오의 혐오는 학술적으로 동의가 된 단어의 사용이지만 게이라는 용어에서 동의가 된 사용은 정체성을 칭하는 용어지 게이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데에 있어서 게이라는 용어 하나로 설명되는 사항은 학술적으로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사실상 적용이 불가능한 비유입니다.]
[정체성이 고정이 된 것은 아닌 것은 이론적으로 맞는 이야기이지만 기본적으로 도로님 논의의 문제점은 정체성의 고정-비고정의 개념화 차이가 아니라 성적 지향성과 성적 정체성을 나누는 데에 존재합니다. 성적 지향성은 앞서 이야기 했다시피 사회적으로 그리고 담론적으로 형성이 되는 정체성 항목으로써 그 자체적으로 사회적인 정체성 항목의 역할을 수행을 합니다. 이러한 잘못된 성적 지향성의 개념화를 바탕으로 성적 지향성이 정체성이 아니라고 주장을 하는 문제에 있어서 사실상 사회적 정체성 항목인 성적 지향성을 현재 도로님이 고정된 개념으로,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기반으로 한 개념화를 펼치고 계십니다.]
제가 사전에 이러한 의미를 지닌다고 얘기했을 때 어찌 됐거나 제 문맥 안에서 그 단어는 그 뜻을 가집니다. 그것을 유의하지 않는 것이 "학술적으로 인정이 안 되기 때문에"라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학술적으로 인정된다는 게 과연 누구의 인정인가요? 권위주의를 비판하신 분이 학술적 인정을 바라는 것은 과연 해체적인지도 의문이 듭니다. 단어 사용의 부적격함과 주장에 대한 반론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단어가 옳지 않아서 주장이 틀렸다, 는 건 맞춤법 검사기가 할 법한 이야기 같습니다.
 
5-2.
[앞서 정체성을 정의 할 때 정체성이란 타고난 성질을 기반으로 해서 인식, 그리고 사회적인 내집단 외집단 형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정체화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가 현재는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며,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면 그 논리에서는 엄연히 내적 모순이 발생합니다.]
"정체성"이란 용어에 대해서 이조님은 계속해서 구성 요소와 생성 방식을 혼용하고 있습니다. "생득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 "왜 앞에선 타고났다고 하더니 뒤에선 만들어졌다는 것이냐?"고 물으면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무언가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것을 무에서 창조하는가? 구성은 요소의 합이 아닌가? 요소 하나가 구성을 온전히 대변하는가? 이것은 솔직히 왜 그렇게 질문하신 건지 이해가 잘 안 가네요.
 
5-3.
[결국에는 지금 논의 하는 지점은 정체성과 수행성 사이의 보이는 괴리감을 어떻게 해소를 할 것인가라는 지점에서 그냥 모순되는 정체성으로 정의를 하자는 주장을 펼치는데 버틀러는 욕망-지향성-섹슈얼리티등의 동일시하는 담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을 합니다.]
인용하신 문장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sexuality is never fully 'expressed' in a performance or practice"라고 하는 게 어떻게 둘 사이의 연결 고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가요? 역 문장으로 "행위는 섹슈얼리티의 표현이 절대 아니다"라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일단 그건 항상 성립하는 것도 아니고, 성립한대도 그렇다면 우리는 섹슈얼리티가 존재한다는 것조차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우리가 섹슈얼적이라 생각하는 행동들이 사실은 조작됐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점은-역시 위의 전뇌 존재적인 생각이라 말하겠습니다.
 
5-4.
[또한 저는 도로님의 로맨틱 이끌림에 대해서 로맨티시즘이 근대적으로 형성된 개념이기에 로맨틱 이끌림에 대한 회의감, 로맨틱 이끌림이 우정의 확장이라 이야기를 했지만 저희가 기억을 해야 되는 것은 이러한 담론적 개념들은 담론적으로 형성되기에 역사성과 역사적 맥락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게이라는 개념이 실질적으로 저희가 현대적으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힌지는 1970년대입니다, 그 이전 까지는 게이라는 용어는 드랙 퀸, 드랙 킹,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등 LGBTQIA+ 같은 용어로 이용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게이라는 용어 역시 근현대적으로만 이용이 됐고 또한 담론적으로 현대적인 개념이기에 저희는 이러한 개념을 거부를 해야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점이 듭니다.]
로맨스가 근대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의심해야 한다는 점은 로맨스 개념을 거부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과해석'됐음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AB일 수도 있다는 점을 A의 전면적 부정으로 보시는지 의아하군요. 말씀하신 게이의 현대적 개념이 남성 남성애자를 말하는 거라면 제가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실 순 있겠습니다. 이건 개념의 문제라기보단 용어의 문제라서 그다지 적절한 대치 같지 않네요.
 
5-5.
[마지막으로 로맨틱와 성적 지향성의 구분이 명확하게 안되며 이 둘은 필연적으로 연결이 된 관계라는 것은 결국에는 로맨틱 지향성을 주장하는 에이섹슈얼들의 존재를 불가능한 존재로 개념화하는 것 외로는 해석이 될 수 없습니다. 로맨티시즘 그리고 성적 지향성이 필연적으로 서로 인과 관계에 놓이게 된다면 로맨틱 지향성을 주장하는 에이섹슈얼들이란 존재 그 자체가 모순이 됩니다.]
성적 지향성에 대해서는 옳은 해석입니다. 저는 로맨틱 지향을 가진 에이섹슈얼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있기 바랍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이유가 있기 때문일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섹스의 수행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다면 로맨틱 끌림과 성적 끌림을 굳이 구분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그 둘의 구분은 에이섹슈얼이기 때문에 가능한 구분인 거 같고.
그리고 오히려 성적 끌림-지향성이 이조 님의 주장대로 구성된 것이라면, 또 그것만으로 정체성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에이섹슈얼'을 불안한 위치에 놓는 것이 아닌가요? 구성된 존재는 바뀔 수 있지 않나요?
 
5-6.
[또한 로맨틱 지향성이 자의적이라는 주장을 했지만 앞서 이야기한 버틀러의 특수성의 비판에서 봤다시피 사실상 성적 지향성 역시 자의적인 개념으로써 생각을 할 수도 있는 지점에서 사실상 현재 로맨틱 이라는 개념이라는 해체에서 이용한 논리는 도로님이 기반으로하는 담론 내부로 성적 지향성의 (저는 정체성과 지향성의 구분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기에 구분 하지 않겠습니다) “해체로 그대로 이용을 할 수 있는 논의점이기에 사실상 이 부분에서 도로님은 스스로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맨틱이 자의적이라는 건 위의 로맨스가 근대적 구성물이라는 점에서 나온 주장입니다. 나를 '게이'로 구분하는 것이 자의적이란 부분이 더 어울리는 설명일 것입니다. 저는 성적 지향성에 대해서는 생득적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분명히 구분을 뒀습니다.
 
버틀러가 정체성 선언을 이미 비판했다는 점은, 몰랐는데, 제가 먼저 생각한 줄 알았는데 역시 아니어서 좀 아쉽긴 한데, 저것이 정말로 비판인가? 싶네요. 저는 이미 "앵커 효과""루프 효과", “반향이라는 말을 써서 똑같은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그러나 주장 부분이 다르기는 한데.
우리가 정체성 선언을 거부함으로써 얻는 것은 비-규정 상태이며, 나에게나 타인에게나 정보값 0의 상태입니다. 그것이 버틀러가 원하는 것이라면 흥미롭다고 해두겠습니다. 저는 적어도 50만 자의 글자를 가진 책에 제목을 붙일 수 있다면, 수억 권의 책을 장르로 묶을 수 있다면, 우리의 정체성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5-7.
[이것은 기본적으로 퀴어라는 개념의 역사와 이론적 중요성을 모르는 선언입니다. 퀴어라는 단어의 사용은 1970년대에 급진적 퀴어 단체들이 기존에 존재했던 호모필 운동에서 펼쳤던 리버럴 정체성 정치학의 거부로써 사실상 퀴어란 단순히 게이, 레즈비언, 바이, 기타등등을 모두 포용하는 우산적인 단어가 아니라 게이, 레즈비언, 바이, 기타등등의 정체성들의 고정되고 본질적이며 정체성 정치학을 거부하는 표현입니다. 즉 엄연히 따지면 나는 퀴어이자 게이라는 표현은 정치성이 모순이 되는 두 가지 단어를 정체성으로 선언을 함으로써 내부적인 모순입니다.]
퀴어 정체성과 게이 정체성 부분에서는, 또다시, 제 개념을 사용해주지 않으셨는데, 이것은 제 레퍼런스 부족이었으니 참고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소 아쉬운 점은 적어도 그 부분을 부정하셨다면 재구성해서 "제가 의도한 말"로서 읽어주셔야지 본인의 언어로 해석하시면 그것은 오역인지라. 에그머니나를 egg money me로 해석해서 읽으면 당연히 말이 안 되는 거죠.
 
5-8.
[앞서 이야기한 게이와 퀴어의 정치성의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 했지만 현재 이야기한 정체성 항목들은 항목성이 다르잖아요. 기본적으로 이러한 비유의 문제점은 원래 논점으로 돌아오자면 퀴어와 게이, 혹은 바이섹슈얼 게이 같은 용어들은 항목성이 동일한 항목성이라는 것입니다. 더 올바른 비유를 하려면 과연 저소득층이면서 중산층이라는 정체성이 가능한가등의 질문이 던지는 것이 더 현재 논의점과 맞다아 있는 비유이자 질문입니다.]

저는 항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바이섹슈얼 게이는 거친 비유로, 인종과 국적으로 비유한 바 있습니다. (https://twitter.com/phaents/status/777303998697046016) 이것을 역시 용어가 틀렸다는 점으로 개념까지 틀렸다고 하시는 것은 그다지 옳지 않은 듯합니다.

저의 바이섹슈얼 게이에 대한 의견은, 바이섹슈얼 게이는 헤테로 사회와 게이 사회의 상호배타성에서 태어난 존재가 맞기는 하는 점입니다. 두 사회의 상호배타성이 바이에게 선택을 강요했고 그것은 억압적이고요. 그러나 바이 개인에게 이에 붉은 깃발을 들고 혁명의 전사가 되어 저항해야 한다고 종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점을 백만 번째 다시 말하고 접겠습니다.
그리고 바이섹슈얼 게이라는 게 다른 층위라는 점이 가장 근본적인 제시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도돌이표를 찍은 것 역시, 다소 의아합니다.
 
5-9.
[이 지점에서 결국에는 바이는 개념부터가 본질적으로 비가시적인 개념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인데 사실상 최근 몇 년간 가장 파급적이고 가시적이였던 연예인 커밍아웃을 생각하면 이러한 주장은 쉽게 잘못된 개념화임을 알 수 가 있습니다. 프랑크 오션의 예를 보시면 바이섹슈얼으로 커밍아웃 하고 앨범에 그러한 경험들을 담은 노래를 내므로써 2010년 이후 케이틀린 제너의 트랜스젠더 커밍 아웃까지 가장 이야기가 많이 된 커밍아웃입니다. 오히려 많은 게이나 레즈비언 연예인들의 커밍아웃에 비해서도요. 그렇다면 비가시성은 바이섹슈얼리티의 본질적인 특성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듭니다.]
가시성이라는 것은 커밍아웃의 파급 효과로 말을 하는 게 아닐 텐데······ 누군가가 범죄자로 밝혀져서 파문이 일면 범죄자의 가시성이 크다는 증명인가요? 가시성이란 말 그대로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긴데······ ······. 예를 들어 게이 커플의 가시성은 둘이 동성이라는 점에서 헤테로로는 패싱되지 않는 점에서 있는 것 아닌지.
 
5-10.
[이러한 가시화가 해결책이라는 것은 엄연히 정체성 정치학에 기반이 됐던 사실을 인지해야 하며 과연 정체성 정치학이 퀴어 해방에 도움이 되는 정치학인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버틀러는 다음과 같이 이러한 가시화를 유일 초점으로 둔 담론을 비판합니다]
버틀러의 인용문만 보면 가시화를 유일 초점으로 둔 담론을 비판했을 때 그것은 가시화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우려 때문으로 읽히는데, 가시화되지 않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침묵으로서의 경의와 다를 게 없다고 보는데, 그것을 영구히 지속하려는 정책으로서 생각한다면 저는 의문을 표합니다. 그것은 임시방안이 아닌가요? 네 뭐 트랜스휴머니즘이 오면 걷히겠지만 그거는 이론 자체가 그다지··· 될 텐데.
 
 
6. 결론
 
저의 결론은, 모든 것을 부수어 놓고 이것이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지난 세기에 많이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는 부순 것을 재료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