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2일 목요일

정체성 소고 - 바이섹슈얼 게이는 바이의 꿈을 꾸는가?


목차
 
1. 정체성 소고 - 바이섹슈얼 게이는 바이의 꿈을 꾸는가?
2.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3. 그들의 몰이해
4. 바이섹슈얼 게이는 불가능한가? - 비교
4-1. 헤테로섹슈얼 에이
4-2. 호모섹슈얼 헤테로
4-3. 바이섹슈얼 헤테로
4-4. 헤테로섹슈얼 게이/바이
4-5. 바이섹슈얼 바이
5. 바이섹슈얼 게이는 디나이얼 바이인가?
6. 섹슈얼리티 특수성
6-1. 에이섹슈얼, 이것은 섹슈얼리티인가? - 무분별한 로맨틱에 반대한다
6-1-1. 섹스, 로맨틱, 릴레이션쉽
6-1-1-1 로맨틱 관계 설정은 자의적이다.
6-1-1-2. 로맨틱은 일종의 정체성 선언이다.
6-1-2. 로맨틱이란 무엇일까?
6-2. 섹슈얼리티와 정체성 귀납적 추론, 존재 연속, 경험
7. 게이 정체성, 퀴어 정체성, 바이 정체성
8. 바이섹슈얼 바이 정체성
9. 독자적인 섹슈얼리티 정체성
10. 결론 정체성이란.
 
 
 
1. 정체성 소고 - 바이섹슈얼 게이는 바이의 꿈을 꾸는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당황스러워서다.
 
나는 며칠 전 트위터에서 꽤 많은 사람과 적극적인 싸움을 벌였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다시 한 번 정확히 말하지만, 논쟁이 아니라 싸움이었다. 합의되지 않은 개념어 때문에, 나와 그들 사이에는 이 오간 게 아니었다. 그렇게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싸우는 건 강아지랑도 할 수 있다. 야 좀 조용히 해, (인용알티) 멍멍멍멍? [캡쳐] 왈왈왈왈. 서로 간의 단어 정의가 합의되지 않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된 의사소통일 수가 없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정말로, 근본적으로, 무엇이 문제였을까?
 
나는 그들이 정체성에 대한 개념이 나와 다르다고 결론지었고, 이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2.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개념이 문제였으니 개념부터 정의하고 넘어가자. (결론부에서 좀 더 정확히 정의되겠지만.)
 
<정체성>은 단순히 자신의 타고난 성질을 인식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거기서 이 인식을 통해 내가 어떻게 나를 정의할 것인가를 내 존재 연속(경험)에서 이끌어내고, 누구를 동질화할 것이며 누구를 이질화할 것인지도 정해야 한다(정체화).
 
간단히 말해서, 내 스스로 우리 동네와 너네 동네를 나눈다는 거다(내집단-외집단). 그리고 우리 동네의 이름이 나의 정체성이 된다. (그냥 ! 내가 호모섹슈얼이었구나. 그럼 나는 게이구나.”가 되는 게 아니다!)
 
여기에 더불어서 타인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가까지 포함된다. 말하는 부분정체성 선언이라고 하자. 타인에게 정체성을 선언함으로써 개인은 다시 정체성을 강화한다.
 
그런데 정체성 선언은 사실 살면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시스 헤테로는 정체성이 없을까? 혹시 호모포비아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봤는가? “난 일반인이야.” 이때 화자의 일반인이라는 단어는 시스 헤테로라는 정체성을 함의하고 있지 않은가? (학생 선서, 히포크라테스 선서, 애국가, 법정 증인 선서 등 누가 시키는 것으로도 정체성 선언은 일어난다.) (심지어는 거짓말일지라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통해서 내적 인식은 이루어진다.)
난 오타쿠야” “나는 이런 장르를 파라고 할 때조차 정체성 선언이다. 오타쿠로서의 정체성,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고 이것들은 전부 를 구성한다. ‘는 한 개의 정체성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내가 나는 바이섹슈얼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물론 바이섹슈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다. 그런데 이것은 성적 지향성에 대한 정체성이다. 사실 당신이 바이섹슈얼이라는 점은 당신에 대해서 별로 말해주는 게 없다. 그건 당신이 헤테로섹슈얼이거나 호모섹슈얼 등이어도 마찬가지다. (에이섹슈얼은 좀 다르다. 뒤에 설명하겠다.) 성지향성적 정체성은 당신의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나는 게이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내가 게이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그에 일부임에 대한 정체성이다. 게이 친구들게이짓을 한다는 거다(이는 상태와 수행을 말한다). 그럼 바이섹슈얼 게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디나이얼 바이인가? 나는 (특정 젠더에 대한) 섹슈얼을 부정하는 디나이얼을 뜻하는가?
아니다. 바이가 두 가지 지향을 범용하는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모노섹슈얼-모노아모리적이다. 그리고 현재 트위터에서 형성 중인 바이 정체성에 관해서라면, 나는 거기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에 비판하려고 한다.
 
이 글에서 걱정되는 부분은 내가 ‘~로맨틱개념을 조금 해체 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살면서 내가 로맨틱한끌림을 느낀 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 네 번 정도? 그래서 당사자성이 많지는 않다. 이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여러 추가 의견, 혹은 반박 및 비판이 있으면 좋겠다.
 
아무튼, 내가 바이섹슈얼 게이라고 말한 날에 일어난 일부터 시작하겠다.
 
 
3. 그들의 몰이해
 
내가 트위터에 바이섹슈얼 게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 유형 1
: “바이섹슈얼 게이는 바이섹슈얼인데 거의 호모섹슈얼이다. 그런 건 없다. 그냥 바이섹슈얼이다.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여성 혐오에서 혐오를 개념어가 아니라 일반어로 생각하는 것처럼, 게이를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한 개념어-‘게이 커뮤니티로 생각하지 못하는 문제다. 즉 아예 정체성에 대한 관념이 없다. 있다 하더라도, 바이섹슈얼-바이섹슈얼, 호모섹슈얼-게이(레즈비언)처럼 성 지향성-성적 정체성을 일치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일치시키지 못하면 디나이얼이며 일치되어야만 진정한 퀴어로 각성-하고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생각한다.
 
- 유형 2
: “바이섹슈얼 게이는 바이의 독단적 의제가 없기에, 정치적 목적하에 게이 정체성을 입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이루어지는 정체화다. 이는 바이섹슈얼을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두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바이섹슈얼을 지운다(가시화를 막는다).“
이것은 도덕적(정치적) 판단에 의한 발언이며, 역시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대해서는 크게 이해가 없다. 정체성 선언은 단순히 개인의 지향성과 내적 주장(‘다짐’)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존재 연속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많든 적든 사회적 요소를 품고 있다.
 
바이섹슈얼 게이는 (성 지향성) 바이섹슈얼 + (성적 정체성) 게이로 이루어진 단어다. 그런데 유형 1은 이것을 (성 지향성) 바이섹슈얼 + (성 지향성) 호모섹슈얼로 읽었고, 유형 2는 개인적-사회(개인을 둘러싼 사회 환경) 차원에서의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유형 1은 그냥 문해력이 부족한 거니 어쩔 수 없다. 그들을 위해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게이덴티티(gaydentity)라거나……. 그러나 그것은 여기서 이야기할 것도 아니며 정체성 개념을 먼저 말해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가까스로 정체성 개념까지 나아간 유형 2는 또다시, 정체성 개념에 대해서 나와 단어 정의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정체성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가? 성적 지향성, 성별 정체성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가 보이지만 (성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일치시키는 것외의 이야기가 잘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이해를 거부한 이전 사례도 알고 있다(임근준 씨를 기억하라). 어째서 그들은 정체성을 모르는가?
 
왜냐하면 (성적) 정체성은 성 지향성과도 다르고, 심지어는 성정체성(성별 정체성)과도 성질이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둘 옆에 나란히 붙어 있으니 헷갈릴 만도 하다. 마치 저 단짝 둘처럼 처음부터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행복을 찾는 파랑 정체성은 처음부터 집 안에 있던 것입니다, 두 동생과 함께요.’
 
아니다.
 
기본적으로 정체성은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것이며,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끝까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사실 유동하는 것이다(성적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바이게이뿐만 아니라 헤테로에이, 호모헤테로도 가능하다). 그렇다. 정체성이란 말은 사실 아이러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우리는 정체성정체된 것이 아니다라고 단어 정의를 다시 해야 한다.
 
정체성은 정체된 것이 아니다.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찰스 라이엘 이전에는 지구가 영원하다 믿던 사람들이 있었고, 찰스 다윈 이전에는 종이 불변한다고 믿던 사람들도 있었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한 가지도 아니며, 고정된 것도 아니다.
 
 
4. 바이섹슈얼 게이는 불가능한가? - 비교
 
혼란을 막기 위하여 단어를 정의해놓고 가겠다. 성정체성(gender sexuality)성별 정체성으로, 성적 정체성(sexual identity)정체성으로 가겠다. 성적 정체성이란 단어는 ‘(수많은 정체성 가운데) 성적인 정체성임을 말하기 때문이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정체성에 가까운 것이고, 게이가 성적 정체성이라기엔 모호한 부분이 없지않아 있기 때문이다.
(또 나는 남성애, 여성애 등이 좀 더 맞는 명칭이라 생각하지만, 호모섹슈얼·헤테로섹슈얼이 갖는 일반·퀴어적 상징성 등의 역학 때문에 이 글에서는 ~섹슈얼의 명칭을 사용하겠다. 이 글의 시각은 다분히 시스 남성 게이 중심으로 쓰여질 텐데, 그것은 설명하려는 내가 그렇기 때문에 또 흐름의 일관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넘어가겠다.)
 
바이섹슈얼 게이는 불가능한가? 바이섹슈얼 게이는 호모로맨틱 바이섹슈얼인가? 바이섹슈얼 게이는 디나이얼 바이인가? 아니다. 하지만 이 직관적인 이야기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직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 헛소리지만 논파하기 위해 고려될 필요가 있다.
이에 부득이하게 다른 정체성들을 조어해봄으로써 비교해보려 한다. 정체성 부분은 게이처럼 섹슈얼을 뗀 단어로 만들 것이며, 문서 길이상 헤테로, 호모, 바이, 에이로 특정한 예시만 다루겠다. 그리고 대명사 가 꼭 He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예시가 바이섹슈얼 게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니 끝까지 봐주면 고맙겠다.
 
예시에 나오는 문장은 이렇게 구성된다.
A로맨틱 B섹슈얼 : A에 대한 연애 지향(사귀고 싶은 낭만적인 이끌림)을 가지고 있고, B에 대해서는 성적 끌림(성적인 접촉을 하고 싶은 욕구)을 느낀다.
C섹슈얼 D : C 섹슈얼을 가진 D 정체성(위에 <2.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서 정의한 정체성이다).
 
 
4-1. 헤테로섹슈얼 에이
 
헤테로섹슈얼 에이?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내가 지금 막 만들어낸 말이니까. 그런데 정말 헤테로섹슈얼 에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을까?
 
대표적인 예로 (몇몇 종교의) 성직자를 들 수 있다. 그들 전부가 헤테로인 것은 아니지만 예시를 위해 말하는 것이다. 사회적 외압과 외연에 의한 정체성의 예시로서 말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이성애적 성향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부정하거나, 혹은 인정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에이-섹스함을 표명한다.
 
그들이 실제로 어떤 섹슈얼리티를 지녔다는 것은 중요하면서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실제 섹슈얼리티와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은 또 자신들이 낭만적 성향을 지녔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 중 몇몇은 실제로 로맨틱한 감정을 느끼며, 그 대상은 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추후(6-1-2. 로맨틱은 무엇일까?에서 중점적으로) 이어진다.
 
이 예시는 디나이얼로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4-2. 호모섹슈얼 헤테로
 
이 예시는 흔히들 디나이얼로 생각하는 예다.
 
호모섹슈얼 성향이 있는 사람이 있고, 그가 자신의 성지향성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다고 하자. 그가 외압에 의해 성지향에 반대되는 관계를 강요당하고 이에 굴복하면, 또 이 관계에서 끊임없이 자기모순과 불쾌를 느낀다면, 그는 디나이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사실 디나이얼역시 넓게 보면 정체성의 한 부류이나 이것은 그다지 건강하지 못한 부류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본다).
 
그런데 누군가는 자신의 호모섹슈얼 성향을 인지하고서도 헤테로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다. 섹슈얼리티의 중심이 성적 끌림이며 섹슈얼 행위의 실제 수행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사실이라면, 호모섹슈얼-헤테로 역시 헤테로 행위를 수행하며 헤테로 정체성을 선언하고, 정체화할 수 있다. 그의 파트너는 성적 긴장감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친밀함, 경제적/사회적 공유를 통해 그의 삶을 풍족하게 해줄 수도 있고, 그로부터 얻는 이익에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보통 상대방에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 즉 정체성 선언 부분에서 성적 정체성을 내적으로만 인식하고 선언하지는 않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이 선언까지 이루어진다면?
 
한 파트너가 자신이 호모섹슈얼이지만 헤테로 정체성을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보유하고 싶다고 선언했고, 이에 다른 파트너가 응할 경우, 흔히 위장 결혼이라고 부르는 형태로 성사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위장인가? 결혼이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역시, 조금은 과장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오랫동안 결혼은 사회적-경제적 유대를 맺겠다는 표시로 여겨졌으며, 젠더 권력에서 우위에 있던 남자(와 일부 권력자 여성) 중 다자적 관계 지향자는 이를 이용해 동시에 여러 관계(섹슈얼 관계, 유대 관계)를 추구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 사이의 진실성이다.
 
이 예시는 디나이얼로 볼 이유가 많은 예시이며,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아닐 수 있기도 하다.
다음 예시는 디나이얼로 보기 힘든 예시이다.
 
 
4-3. 바이섹슈얼 헤테로
 
위의 예시와 거의 같은 상황이지만, 다만 예시된 그가 호모섹슈얼이 아니라 바이섹슈얼이라고 하자.
 
바이섹슈얼 게이의 가장 큰 논란 하나는, 그가 바이섹슈얼 정체성을 독자적으로 두지 못한다는 오해다. 그러나 이는 바이섹슈얼은 남녀를 동시에 사랑해야만 바이섹슈얼이다는 말과 동일한 맥락의 오류다. 모노아모리 바이섹슈얼이라면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바이섹슈얼의 성적 끌림과 욕구가 (예를 들어서) 남자 따로, 여자 따로 움직인다고 본다면 그거야말로 웃긴 것이다. HPMP처럼 각기 나눠져 있는 포인트바라도 상상하는 건가?
 
다시 바이섹슈얼 헤테로로 돌아오자. 바이섹슈얼 헤테로는 위의 호모섹슈얼 헤테로와 다르게, 파트너에게 성적 끌림까지 있다. 모노아모리 지향의 개인이라면 이 관계에서 더 이상 무엇을 추구할 수 있을까? 그가 <바이 정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헤테로>와는 다른 가시점을 지녀야 한다. (이 가시성의 문제는 또 많은 <바이>들을 화나게 할 텐데, (가시성과 정체 집단 전략)에서 내 나름의 의견을 이야기할 것이다.)
 
바이섹슈얼 헤테로는 그의 성적 끌림을 인지해도, 모노아모리-모노가미 관계에서는 그것이 (예를 들어)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차피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사회적 외압 등이 있을 경우, (외압에 의해 자기 인식에 난해함조차 겪게 된다면) 그는 더욱더 쉽게 헤테로로서 정체화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외압에 의해 규범이 되는 섹슈얼리티 외의 섹슈얼적 행위 수행에 난항을 겪고, 이에 그가 헤테로적 관계만을 추구하기로 하고, 또한 타인들에게 자신의 바이섹슈얼리티를 숨긴다면, 나는 일반인이야”, “나는 이상한 행위에는 관심이 없어라는 식으로 일반인’-‘헤테로섹슈얼의 성적 정체성적 지향성을 선언한다면, 그는 헤테로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예시의 경우, 기존 이론의 조어에서 헤테로로맨틱 바이섹슈얼과 헷갈릴 여지가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로맨틱) 논의로 이어질 것이며, 여기서 간단히 밝혀두지만 나는 로맨틱 개념은 에이섹슈얼을 언급할 때만 쓰이거나 다른 섹슈얼리티에 적용하려면 철저한 숙고 후에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예시에서, 그가 자신의 바이섹슈얼리티를 자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디나이얼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나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4-4. 헤테로섹슈얼 게이/바이
 
언뜻 보기에는 이상한 조합이고, 디나이얼 같다. 그러나 섹슈얼리티의 핵심이 성적 끌림이라고 말한다면 사실 불가능한 조합은 없다. 에이섹슈얼이 성적 끌림이 아니라 친밀도나 쾌감을 위해 섹스를 한다면, 다른 ~섹슈얼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
 
MSM(men who have sex with men)는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MSM 자체를 일종의 바이 정체성으로 본다면 가능하겠지만). 그들은 자신을 헤테로로 정체화하고 있기 때문에 4-2, 4-3의 경우+헤테로섹슈얼일 경우로 봐야 할 것이다. 이들은 예시는 분명히 게이 혹은 바이로, 혹은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음을 자각(내적 인식)하는 사람들을 위한 예시이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직업적 생활을 위해 GV에 출연하는 사람을 들 수 있다. 또 그저 재미나 친밀감을 위해 이러한 일을 할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SM 같은 관계에서 성별보다 복종 등에 보다 집착하는 경우를 예시로 들 수 있다. 물론 이들은 게이바이로 불리기보다는 또 다른 정체성의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기 바랄 수도 있다. 언젠가 그렇게 할 것이라 본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섹슈얼리티 정체성과 섹슈얼 정체성은 완전히 다른 층위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이섹슈얼 바이 정체성을 짚어보자.
 
 
4-5. 바이섹슈얼 바이
 
자신이 바이섹슈얼리티를 가지고 있고, 바이섹슈얼함을 선언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공유하지 않더라도, 인지하는) 여러 사람들과 바이섹슈얼한 관계를 통해 일종의 바이섹슈얼리티를 체현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게 바이섹슈얼리티의 가능한 모든 형태라는 것이 아님에 유념해주길 바란다.)
 
실제로 이러한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남자 애인과 여자 애인을 동시에 두었던 사람은 많고(프레디 머큐리, 소크라테스(아마도 호모), 카이사르(아마도 바이), 랭보……) 그들 중 몇은 호모·헤테로섹슈얼일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들이 바이섹슈얼한 관계를 맺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의 경우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여러 젠더와 만나며 자신의 성지향성을 탐구하고 그들 나름대로 정체화를 했을 것이다. 혹은 당시 관념의 한계로 동성애자일반인으로 정체화했을 수도 있다. (그냥 자연인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성적 끌림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수 있는 권력자의 경우, 사회상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개인-정체성으로 바이섹슈얼리티를 구현해낼 수 있었다. 이들은 디나이얼이라고 보기 매우 힘들다.
 
이들 역시 기존 ~로맨틱 조어를 활용한다면 “(헤테로, 호모, 바이)로맨틱 + (헤테로, 호모, 바이)섹슈얼어느 정도는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정체성 면에서 볼 때 이는 다소 엉성하다. 이것은 집단을 이룬다기보다 개인-정체성 영역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헤테로와 게이 집단 사이의 상호배타성에 의한 것이며, 바이 정체성은 이 상호배타성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바이 정체성의 성립은 이 상호배타성을 무시-배제하고 집단을 형성하거나(8. 바이섹슈얼 바이 정체성, 9. 독자적인 섹슈얼리티 정체성에서 이야기 할 것이다), 이 상호배타성을 없앤 뒤에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집단으로 형성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상의 예를 통해서 (그게 디나이얼이든 아니든) 실제로 현실 속에서, 성지향성과 정체성이 맞지 않는 경우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고로 관건은 이들이 디나이얼인지 아닌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디나이얼 역시 정의하고 넘어가야 한다. 디나이얼은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다. 또한 그들의 대다수는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숨기거나 <올바른> 성적 지향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바이섹슈얼 게이는 디나이얼인가?
 
 
 
5. 바이섹슈얼 게이는 디나이얼 바이인가?
 
나는 이 역시 생각의 관성에서 못 벗어난 한계라고 본다.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인정하는 것과, 자신의 사회적·성적 정체성을 형성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노아모리·모노섹슈얼 전통사회의 <관습>이다.
 
이 논리에 대한 도식은 다음과 같다.
 
나는 헤테로섹슈얼이다. -> 헤테로섹슈얼 관계를 추구한다. -> 성적 끌림과 일치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나는 일반인이다.
나는 호모섹슈얼이다. -> 나는 호모섹슈얼 관계를 추구한다. -> 성적 끌림과 일치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나는 이반(게이)”이다.
나는 호모섹슈얼이다. -> 나는 헤테로섹슈얼 관계를 추구한다. -> 성적 끌림과 일치하지 않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 나는 탈반/악귀 씌인 사람/디나이얼이다.
 
그런데 이를 비모노섹슈얼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편견의 확장이다. 이러한 것은 모노섹슈얼·모노아모리 사회 기반의 사람들이 갖기 쉬운 편견의 관성이다. 바이섹슈얼이 여러 성과 연애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거나(너 바이니까 여자 만날 거잖아), 에이섹슈얼이 성애적 관계를 전혀 맺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일반 언중이 독신주의자와 무성애자를 얼마나 혼동하는지 생각해보라) 것은 이에 기반한다.
 
바이섹슈얼은 누누이 얘기되듯이, 독점적 관계에서도 만족할 수 있다. 왜냐면 이것은 다자적 연애와는 다른 층위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젠더와의 관계만 반복해서 맺어도 바이섹슈얼은 바이섹슈얼이다. 그렇다고 바이섹슈얼이 게이나 헤테로로만 정체화해야 한다거나, 바이섹슈얼을 그 둘의 과도기로 보는 것도 물론 관습에 해당한다.
 
어째서 바이섹슈얼은 그런가? 일치시키지 않아도 디나이얼이 아닌 이유가 뭔가? 그것은 바이섹슈얼이 비모노섹슈얼이며, 다른 섹슈얼이 아니라 바이섹슈얼이기 때문이다.
 
바이섹슈얼을 설명하는 유명한 그림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소프트콘의 비유다. 바닐라맛이 헤테로섹슈얼이고 초콜릿맛이 호모섹슈얼이라면, 바이섹슈얼은 그 반반이 아니라 딸기맛(전혀 다른 맛)이라는 거다. 정말 그럴까? 오히려 더 나아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바이섹슈얼은 딸기맛 캔디·쌀밥·비프 스테이크일 수도 있다. 그들은 소프트콘과 차가움, 부드러움, 달콤함 등의 가치를 꼭 공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섹슈얼리티마다의 특수성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6. 섹슈얼리티 특수성
 
나는 섹슈얼리티 특수성의 인정을 제안한다.
 
이것은 왜 필요한가? 섹슈얼리티가 일괄적인 적용을 받는 데서 너무나 많은 오해가 양산되기 때문이다.
만약 각각의 섹슈얼이 독립적이라면 당연히 그들의 특수성이 존재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나와 트위터에서 논쟁한 사람들도, “바이와 게이는 상위 개념이 다르다를 운운하면서 어떻게 그들의 특성이 다 똑같을 것을 당연시 생각했는지 참으로 의문이다.
 
다음과 같은 말들은 많다. “왜 에이에게만 진정성을 요구하느냐?”, “왜 바이에게만 다층적 경험을 요구하느냐?” 거꾸로, 그렇다면, 모노섹슈얼-헤테로,게이,레즈,등등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유성애와 무성애, 모노섹슈얼과 비모노섹슈얼에서 각각의 섹슈얼리티들이 분리된다면 그에 따른 특수성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특수성은 다음과 같다.
 
1. 에이섹슈얼 : 에이섹슈얼을 성적 끌림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성적 끌림에 도달하지는 않을 정도(발화점에 도달하지 않는 정도)로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이는 6-1에서 다시 논의하겠다.
에이섹슈얼이라는 단어가 쓰일 경우에만 ~로맨틱이 쓰이는 걸 기본으로 해야 한다. (에이섹슈얼도 포함되지만,) 타 섹슈얼이 ~로맨틱을 주장할 경우에는 정체성영역으로 보고, 심사숙고할 필요가 반드시 있다.
2. 헤테로-호모 등 모노섹슈얼 : 같은 모노섹슈얼 내에서 일치하지 않는 성 정체성을 추구할 경우, 디나이얼로 보지 않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숙고가 필요하다. 즉 이들은 성지향성-성적정체성을 일치시켜야 할 필요성이 일정 부분 있다.
3. 바이섹슈얼, 폴리섹슈얼, 팬섹슈얼 등 멀티섹슈얼 : 성지향성 중 일정 부분에 방점을 두고 정체화하더라도, 그가 만족할 수 있다면, 그것은 디나이얼이 아니다. 그러나 이 경우 정체화하는 데 ~섹슈얼을 앞에 붙일 필요가 있다. (사회적 가시화-개인 정체화 측면에서, 바이게이…… 등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은 잘 다루지 않았으므로 이에 대한 피드백은 남겨주시면 출처와 함께 추가하도록 하겠다. 이 외에도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많을 것이다.
 
어째서 이러한 특수성이 필요한가? 섹슈얼리티의 핵심이 성적 행위가 아니라 성적 끌림이기 때문이다.
 
 
6-1. 에이섹슈얼, 이것은 섹슈얼리티인가? - 무분별한 로맨틱에 반대한다
 
에이섹슈얼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섹슈얼리티에 함부로 ~로맨틱을 붙이는 것을 지양하기 위함임을 말해두고 시작하겠다.
 
섹슈얼리티의 핵심은 성적 끌림이라고 말한다. 그럼 에이섹슈얼은 섹슈얼리티인가? 무신론은 종교가 아니다(‘무신론교가 아니란 뜻이다). -육식주의자와 채식주의자, 평화주의자와 반전주의자 등 무표성 단어가 기본형인 것은 좋지 않다. 그런데 어째서 에이섹슈얼은 에이-섹슈얼인가? 뭐라고 부르긴 해야 하니까. 그래서 (원래 있어야 할 섹슈얼이 없는)(각주1) 에이-섹슈얼이 됐다. 그런데 이것은 그저 관성 때문에 에이섹슈얼이라 불리는 건 아닐까?
 
<헤테로섹슈얼 - 호모섹슈얼 바이섹슈얼 – …… - 에이섹슈얼>
 
에이섹슈얼은 기존 체계에 흡수당했을 뿐, 기존 섹슈얼리티로 설명하긴 다소 이상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가들은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부득이한 설명 방식으로) ‘~로맨틱개념을 만들어냈다.
 
<헤테로로맨틱 - 호모로맨틱 바이로맨틱 - …… - 에이로맨틱>
 
이것은 언뜻 보기에 합리적으로 보인다. 호모로맨틱 에이섹슈얼. 성적 끌림이 없지만, (예를 들어 남성인 남성애자가 다른 남성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방식으로 조합할 시, 바이섹슈얼 게이는 무엇인가? 이것은 호모로맨틱 바이섹슈얼인가? 두 가지 이상의 젠더에 성적 끌림을 느끼지만, (나의 경우) 남자와만 사귀고 싶다는 것인가?
 
아니다. 나의 경우, 딱히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는 것이다. 내 주변 환경과 생득적 체질, 여러 가지 특질이 겹쳐서 호모로맨틱-호모섹슈얼 외에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사과가 잘 자라는데 포도는 잘 자라지 않는 땅에 있는 농부를 생각해보라. 그가 사과와 포도를 둘 다 좋아한대도, 꼭 사과와 포도를 동시에 키울 이유가 있을까? 그래서 사과농장주로 50년을 살면 그가 포도를 먹지 못하는 몸이 될까? ‘과일의 비유는 타당한가?
 
이것은 너무나도 불편한 설명이다. 로맨틱이란 단어 자체부터 의심해봐야 한다. 현대의 로맨티시즘은 근대의 창작물(각주2)이다. 물론 고대에도 이러한 로맨티시즘을 느끼기는 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두 몸에 깃든 한 개의 영혼이라고 말하거나, 몽테뉴가 내가 완전한 사랑을 나눈 사람…… 그 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선택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라. , 그런데 이건 우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에이섹슈얼 얘기는 아니지만)나는 비-섹슈얼적 로맨티시즘은 이 우정의 확장이며,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와서 섹슈얼리티가 너무 강조되는 바람에 이 우정의 개념이 약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사귐에 있어서 성애가 중요한 개념으로 대두되는 것, ‘친구를 사귀다는 용어가 점차 여자/남자 친구를 사귀다에만 배타적으로 사용되어 가는 현상은 현대적인 것이다. 나는 개인과 개인의 사이는 섹슈얼리티를 넘어서 낭만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로 ~로맨틱의 조어는 사실상 에이섹슈얼을 위한 것이며, 다른 섹슈얼리티에 쉽게적용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에이섹슈얼 역시 일종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성지향성 정체성 말고도 실제로 정체성적이다. (~로맨틱이란 지향성은 어느 정도 실재하지만, ~로맨틱이란 조어가 기계적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로맨틱> 부분에서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로맨틱, ‘에이섹슈얼~섹슈얼이라는 단어 구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밀려난 단어다. 이 에이섹슈얼이란 단어가 잘못 조어된 탓에 뜻밖의 일이 펼쳐진다. ~로맨틱 개념이 다른 섹슈얼로도 퍼진 것이다. (에이섹슈얼 탓이라는 게 아니라, 언어의 문제다.)
 
그렇기에 호모로맨틱 호모섹슈얼은 동어반복이 된다고 말하자마자, 당신은 머릿속에 MSM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은 남자와 사귀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섹스는 하고 싶어한다. (헤테로)로맨틱+(호모)섹슈얼이다. 그런 걸 보면 로맨틱+섹슈얼은 항상 짝을 이뤄야만 하는 거 아닐까? 이것은 얼추 맞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렇지 않다.
 
또한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정체성>이란 개념은 설 자리를 잃는다. 왜냐하면 로맨틱은 어느 정도 정체성과 성질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로맨틱이란 무엇인가?
 
 
6-1-1. 섹스, 로맨틱, 릴레이션쉽
 
나는 로맨틱함이 섹슈얼과 릴레이션쉽이 묶이는 지점이라 생각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조금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아예 다른 경험일 수도 있다). 로맨틱함은 타인에 대한 낭만적인 미적 경험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로맨틱한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자.
 
 
섹스
로맨틱
절친한 친구
(특정 젠더에)관심 있음
 
 
 
관심 없음
 
 
 
섹스와 로맨틱은 하고 싶은데 친구는 안 하고 싶을 수 있다.
로맨틱과 친구는 하고 싶은데 섹스는 안 하고 싶을 수도 있다.
섹스와 친구는 가능한데, 로맨틱은 안 하고 싶거나, 친구는 가능한데 나머지는 다 하기 싫을 수도 있고, 섹스만 하고 싶을 수도 있고, 로맨틱만 하고 싶을 수도 있다.
조합의 수는 많다.
 
이 중 어디까지가 섹슈얼이고 어디까지가 로맨틱인가?
문제는 명확해 보인다. 로맨틱을 체크하면 로맨틱이고, 안 하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섹스는 어디부터 어디까진가? 성기 삽입? 애무? 성적인 흥분이 수반되는 모든 것? 로맨틱함과는 다른 불순한 것?
로맨틱은 어디까지이며 친구는 어디부터인가? 친구와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은 어느 정도 낭만적이지 않을까? 오직 연인만이 낭만적인가?
당신은 친구와 키스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당신은 친구와 섹스를 할 수 있는가, 없는가?
놀랍게도 모든 문제에 다 칼같이 바로 답이 나왔나? 그럼 당신은 그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정말로?
 
이 문제는 사람마다 다르다. 생득적인 <~로맨틱 지향>이 실재하나 하지 않나의 문제와 별개로, <로맨틱 관계 설정>은 자의적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시한다.
 
로맨틱 관계 설정은 자의적이다.
로맨틱은 일종의 정체성 선언이다.
 
이 문제 역시 예시가 필요하다.
 
6-1-1-1 로맨틱 관계 설정은 자의적이다.
 
로맨틱만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에이섹슈얼이 아닌 사람이 섹슈얼 없는 로맨틱만 유지할 수 있을까? 섹스리스 부부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그들이 낭만적인 행위를 하는지와는 별개로, 연인의 지위에 있는 두 사람이 섹스를 안 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다자적 관계라면?
 
어떤 사람들은 성적 지향과 연애 지향이 완전히 나뉠 수 있다고 말한다. 조금 극단적으로(사실 트위터 바이오 보면 딱히 극단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다수인) 예를 들자면 팬로맨틱 헤테로섹슈얼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혹은 헤테로로맨틱 팬섹슈얼을 생각해봐도 좋다. 이것은 정말로 바이섹슈얼 게이보다 말이 되는 개념인가?
 
시스남성 팬로맨틱 헤테로섹슈얼 A씨를 가정해보겠다. 그는 시스남성 호모로맨틱 팬섹슈얼 B씨와 사귈 수 있다. 이들은 섹스는 하지 않을 것이며, 한다 하더라도 A씨는 B씨에 대한 성적 끌림이 없다. 에이섹슈얼과 다른가? 다르다. A는 여자에 대해서는 성적 끌림이 있다.” 그것은 생득적이다.
 
그런데 이 관계에서 그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지만, 로맨틱 관계를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섹스하지 않아도 연애는 충분히 낭만적이며 즐거운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는 독점적 관계에서 충분히 팬로맨틱일 수 있다. 상대방에게 연인이라는 타이틀만 준다면.
 
그렇다면 다자적 관계를 생각해보자.
 
폴리아모리 팬로맨틱 에이섹슈얼인 B씨를 생각해보자. 그는 이론적으로 모든 젠더와 사귈 수 있다. 물론 그가 꼭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가능한 상황을 가정해보자는 거다. 그는 모든 사람을 연인의 지위에 둘 수 있다. 그들과 정서적이고 친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것은 친구랑 다른가?
 
이번에는 에이로맨틱 팬섹슈얼인 C씨를 생각해보자. 그는 많은 사람과 섹스를 하지만 친구이거나 섹스파트너일 뿐이지 연인은 아니다. 그들이 섹스하고 즐거운 시간을 나누고 친밀한 정서적 유대가 있더라도 로맨틱하진 않다.
 
이것은 그들이 정체성 선언으로 팬로맨틱’ ‘에이로맨틱을 외쳤을 때의 일이다. 그들이 팬로맨틱’ ‘에이로맨틱이라고 스스로 또한 동시에 타인들에게 선언하지 않는 경우, 그들 모두 연인이거나 그들 모두 친구로 볼 수도 있다. 즉 그가 팬로맨틱한 사람이어야 그 관계가 팬로맨틱해지는 것이고, 그가 에이로맨틱한 사람이어야 그 관계는 에이로맨틱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성적 끌림이 있어도 없어도, ‘로맨틱한 사람이 해야만 그 관계는 로맨틱이 된다.
 
그렇다면 로맨틱한 감정이라는 건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로맨틱섹슈얼을 정말로 구분할 수 있는가?
성적 끌림이 있는 관계에서 로맨틱과 섹슈얼을 온전히 구분하라는 것은 한 개인에게는 너무 가혹하거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성적 흥분과 낭만적 흥분을 다른 컵에 담듯 확실히 구분지을 수 있는가?
 
이것을 구분짓는 것은 개인의 일이다. 또한 에이섹슈얼의 경우와는 다르다.
 
 
6-1-1-2. 로맨틱은 일종의 정체성 선언이다.
 
현재의 로맨틱은 일종의 정체성 선언이다. 내가 어떠한 섹슈얼리티를 갖고 있지만 이보다 더 크거나 작은 숫자의 젠더와 로맨틱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선언이다. 왜냐하면, 지향성이 생득적이라지만 이 역시 귀납적 추론으로 얻어지는 내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즉 지향성은 정체성과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분리가 쉽지 않다(그러니 바이섹슈얼 게이에 대해서 이렇게 긴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닌가).
 
에이섹슈얼 외의 경우에서 이것은 더 분명하다.
 
바이로맨틱 헤테로섹슈얼 D씨를 가정해보자. 이 사람이 실제로 연애 지향을 느꼈을 경우와 안 느꼈을 경우 둘 다, 로맨틱 선언은 정체성 선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남녀만 상정하겠다. (논바이너리적으로 봤을 때 맞지 않을 경우,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한다.)
 
실제로 연애 지향을 느꼈을 경우
D씨는 남성과 여성 둘 다와 연애를 하고 싶다고 느꼈다. 그러나 성적 끌림은 둘 중 하나에만 있다고 인식했다. D씨는 여태까지의 존재 연속으로 보아, 자신이 바이로맨틱하지만 헤테로섹슈얼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공표한다.
 
실제로 연애 지향을 느끼지 않았을 경우
D씨는 둘 다에 연애 지향을 느껴본 적은 없다. 성적 끌림 역시 헤테로섹슈얼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D씨는 여태까지의 존재 연속으로 보아, 다른 성과의 연애 역시 가능할 것으로 추론하고 이를 공표한다.
 
D씨는 남성 애인 혹은 여성 애인을 사귈 수 있지만, 어느 경우에는 섹스를 하지 않음(적어도 자의적으로는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웃긴 비유지만 들어보도록 하자. D씨가 남자라고 했을 때, D씨는 호모로맨틱 에이섹슈얼헤테로로맨틱 헤테로섹슈얼이다. 말이 안 되는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행위의 영역에 한정했을 때, 저것이 바이로맨틱 헤테로섹슈얼과 다른가?
 
앞서 말했듯 로맨틱함은 자의적이다. ‘연애적 끌림을 느꼈지만 성행위는 수행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4-1헤테로섹슈얼 에이와 어떻게 다른가? (피드백 환영함).
 
나는 D씨는 바이섹슈얼 헤테로라고 봐야 좀 더 적확한 표현이라고 본다. ~로맨틱은 약화된 섹슈얼 관념이며, 성행위를 안 하겠다는 것은 사회적 외압·외연에 의해 거부감이 있을 경우가 적잖이 섞여 있을 거라 추측한다.
 
하지만 이 경우를 상정하면, ~로맨틱 에이섹슈얼이 전부 “~섹슈얼 에이로 변한다. “그럼 진짜 에이섹슈얼은 없다는 거냐? 에이로맨틱만 에이섹슈얼이냐?”라고 물을 수 있다. 그것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에이섹슈얼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현재 이론과 에이섹슈얼이란 조어의 문제다.
 
나는 에이섹슈얼이 보다 나은 호칭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연애지향자·낭만지향자(로맨틱-오리엔터)라거나, 로맨티시스트(낭만주의자)라거나(내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정할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채식주의자를 비-육식주의자로 부르지 않는 이유, 무신론자를 불신론자로 부르지 않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진 모르겠지만, 비피성연자라는 말을 쓰자는 움직임은 있다.
 
결론적으로 ~로맨틱이라는 말은 에이섹슈얼에게만 쓰이거나, 타 섹슈얼이 사용할 경우 충분한 근거가 필요하거나, 기존 이론 내에서 설명하고자 할 때만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그런데 여러분은 또다시 반박할 수 있다. “내 지향성에 대해서 어째서 근거가 필요한가? 지향성은 생득적인 것이라 하지 않았나?”
 
그것은 사회적 외연과 관련되어 있고, 존재 연속,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로맨틱 지향>을 말하기 위해서, 일단 <로맨틱>이란 무엇일까 탐구해보자.
 
 
6-1-2. 로맨틱이란 무엇일까?
 
6-1-1에서 가볍게 언급했으나, 가볍게 이야기하고 넘어가기엔 다소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로맨틱은 연애 지향으로 설명된다. 정서적 유대를 맺고 싶은 감정이라 풀이할 수 있는데, 위에서 나는 이것이 섹슈얼리티를 넘어서 사용할 수 있거나, 섹슈얼과 릴레이션쉽을 엮어서 사용한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로맨틱함은 타인에 대한 낭만적인 미적 경험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것들이 무슨 소리인가?
 
로맨틱한 감정은 타인에 대한 미적 경험으로, 로맨틱한 유대는 인간 사이의 유대로 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어쩌면 거칠 거나 논리적 비약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필요가 있다.
 
4-1에서, 나는 성직자의 신에 대한 감정이 로맨틱하다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비단 신뿐만이 아니다. “나는 국가와 결혼했다” “나는 철학과 결혼했다” “나는 예술과 결혼했다같은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이것은 비유적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감정을 느끼는 경우도 왕왕 있다.
 
특히 남성적으로 여겨지는 기독교의 신과 다소 성애적이거나 낭만적인 체험을 이야기하는 성녀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꿈에서 천사에게 빛나는 창으로 여러 차례 찔리며 흥분했다(성녀 데레사)는 식이다. 나는 마저리 켐프 서(<마저리 켐프 서>, 마저리 켐프, 정덕애 역, 황소자리(2010))를 읽은 적이 있으므로 여기서 몇 구절을 발췌해보려 한다.
 
혼인빚을 갚는 일(부부 사이의 성교)이 그녀에게는 너무나 경멸스러워서 강요받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발적으로 성교에 동의하느니 똥오줌을 먹고 마시고 시궁창에서 뒹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41p) / 그녀는 주님의 묶인 손이 십자가상에서 풀어지면서 사랑의 표시로 자신을 안아주기를 수없이 원했죠. (44p) / “, 주님, 처녀들은 지금 천국에서 즐겁게 춤을 추고 있나이다. 저는 그리할 수 없을까요? 제가 처녀가 아닌지라, 처녀성이 없는 것은 지금 제게 큰 슬픔입니다. 제가 세례반에서 내려졌을 때 바로 죽었더라면 당신을 결코 불쾌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하였다면, 축복받으신 주님, 당신께선 제 처녀성을 끝없이 가질 수 있었겠지요. ()” (104p) / “() 딸아, 너는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 알지 못하도다. 그 사랑의 크기는 이 세상에서는 가늠할 수 없고 제대로 느낄 수도 없으리니, 만약 알게 되면 네가 느끼는 기쁨으로 인해 심장이 멎고 터지면서 견디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 ()” (275p)
 
비록 종교가 보다 유년기의 부모·부채의식·인과관계를 따지는 인간의 성향 등과 관련이 많은 분야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어느 정도는 낭만적인 뉘앙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는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제로 다양한 대상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고, 이에 성애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필리아로 붙은 수많은 성애를 염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곧장 로맨틱함으로 연결된다는 주장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사람은 다양한 대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이것은 미적 경험으로 불리고 있다. 그것은 미적 태도와 관련 있는 것인데, 만약 태도의 문제로 인해 이것을 미적 경험으로 인식하기보다는 로맨틱함으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섹슈얼한 끌림과 조합된다면 말이다.
 
태도, 이것은 사회적 외연과 관련되어 있고, 존재 연속,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누군가가 추하다 생각하는 것을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정신적인 유대만 맺을 수 있는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을 누군가는 섹스와 결부시키거나, 결부시키지 않으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 주체이며, 이 주체가 자신을 정의하려고 하는 시도, 정체성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로맨틱하다고 하는 것은 개인이 나는 ~한 젠더와 보다 특별한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독점적 관계에서 배타적인 상태를 염두하며 하는 말이다. 6-1-1-1처럼 다자적 관계를 상상해보면, 이 로맨틱함은 다소 힘을 잃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부분은 나 자신도 그렇게 확신이 있는 분야는 아니므로 좀 더 이야기해본다면 좋겠다.
 
어쨌거나, 이를 통해 로맨틱하다는 것은 정체성 선언임을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것은 숙고되어야 하는가?
 
 
6-2. 섹슈얼리티와 정체성 귀납적 추론, 존재 연속, 경험
 
팬로맨틱” “팬섹슈얼E씨를 생각해보자.
 
일단, 살면서 그가 모든 젠더를 만나봤을까? 남성애-여성애-간성애가 옳은 표현이라고 해도 그가 살면서 그 성별들을 다 만나봤을까?
운 좋게도 만나봤다고 하자.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그 개인에 대한 선호도 차이로 인해 성적·연애적 끌림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는 어떻게 팬로맨틱임을 알 수 있는가? 그는 어떻게 팬섹슈얼임을 알 수 있는가?
 
전에 이러한 내용의 트윗을 본 적이 있다. “에이섹슈얼 정체화는 왜 헤테로 정체화하듯 가볍게 하면 안 되는가?” 그것은 헤테로의 정체화를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다.
아니다. 헤테로섹슈얼 역시 가볍게 정체화해서는 안 된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퀘스쳐너리이며,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정체성 선언을 통해 존재 연속을 확립할 뿐이지 기본적으로는 퀘스쳐너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우리(퀴어)-정상이 함의하는 부정적인 뜻(고쳐야 할 사람)을 가진 건 아니지만, 분명히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소수자성, 비대중성은 우리를 아직 퀴어 정체성으로 묶고 있는 가장 큰 기둥 중 하나다. 우리는 다수자아니기에, 좀 더 강한 확신이 필요하다.
 
드디어, 나의 경우를 이야기해보자. 나는 어릴 때 당연히 헤테로섹슈얼적 매체에 노출되며 자랐다. TV 드라마, , 성인 비디오, 아동물……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BL” 일러스트를 보게 됐고, BL 만화책을 보게 됐다. , 호모·바이섹슈얼적 레퍼런스가 나에게 외연되었다.
나는 처음에 내가 호모섹슈얼인 줄 알았다. 중학교 1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여전히 여성에도 끌리지만 그것은 그냥 단순한 자극에 의한 게 아닌가 혹은 헤테로섹슈얼적 매체의 영향(세뇌)가 아닌가 의심을 품었고, 고등학교 졸업쯤에는 여성의 벗은 몸에서도 성적 흥분을 느끼지 않았다(않으려고 노력했기도 하다). 그 사이, 나는 나를 호모섹슈얼로 내적 인식했다.
그러나 대학교에서 나는 여자에게 다시 성적·연애적 끌림을 느꼈다(대상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번에는 그렇다고 남자에게 느끼는 끌림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간 건 아니었다. 나는 이것을 분명히 내적 인식했으며, 기존의 내적 인식과 연속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나에 대해서 좀 더 탐구해야 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내가 바이섹슈얼이지만 어릴 적 경험 때문에 여자에 대해서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내가 여자에게 연애 지향을 느끼지 못했는가? 여자와 사귈 수 없는가? ‘없다안 한다사이에는 간극이 크다. 나는 내 존재 연속, 그리고 사회적 외압 (상대방에게 내가 바이섹슈얼임을 밝히기 다소 껄끄러운 상황), 경험(트라우마) , 여자와 사귀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는 게이 커뮤니티에 이미 속해 있었고, 굳이 벗어나고 싶지 않았으며, 만족 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이섹슈얼 게이바이섹슈얼 바이를 지운다는 논점의 근거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이섹슈얼 바이가 게이로서 만족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현재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바이섹슈얼 바이 정체성, 이 주장에 의해 지워진다.”
 
바로 바이 정체성으로 넘어가고 싶지만, 이를 위해서는 정체성에 대해서 한 번 더 이야기해야 한다. “성지향성도 귀납적이고 성적 정체성도 귀납적이라면, 둘을 일치시키는 것이 맞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7. 게이 정체성, 퀴어 정체성, 바이 정체성
 
앞서 말했듯 헤테로에게도 정체성이 있다. “일반인혹은 스트레이트라는 말이 이를 대신한다. 그러나 이는 적대적인 호칭이고, 요즘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이성애자가 되겠다.
 
그렇다면 게이/레즈비언 정체성은 뭘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일반/이반/탈반을 나눈 이유는 뭔가? 그것이 어떠한 사회적 커뮤니티, 혹은 사회적 관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반이란 말은 일반이 아닌, 만 뜻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이반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행위함을 의미한다(‘은둔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는 이반이나 사회적으로는 이반이 아님을 뜻함. 이 경우 사회적 정체성이라 보기 어렵다). 탈반은 무엇인가? 내가 (호모/바이)섹슈얼을 지니고 있지만 그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 탈반 역시 (위에서 말한 호모섹슈얼 헤테로 같은) 정체성이다.
 
그런데 게이/레즈비언만으로는 포함되지 못하는 섹슈얼리티나 정체성이 많다. 이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상위 개념이 하나 있는데, 바로 퀴어. 우리는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많은 섹슈얼리티를 아우르기 위해 퀴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냈고, “퀴어 단체를 통해 퀴어 활동을 하며, “퀴어로서 살아간다. 이것은 너무나 확실히 정체성이다. 그러나 너무 범-섹슈얼리티적이기도 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게이 정체성을 외친다면 나올 수 있는 비판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퀴어 정체성보다 게이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거냐? 과거로 회귀하겠다는 거냐?” 퀴어 정체성이 있는 상황에서, 게이 정체성을 다시 외치는 것은 퇴행인가?
 
사회적 정체성의 경우,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게 더 이상하다. 예를 들어서 나는 퀴어, 학생, 수도권 거주자, 한국 태생, 인문학도, 한부모가정, 저소득층, SNS 사용자, 서브컬쳐 팬…… 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회적으로 퀴어이면서 사회적으로 게이일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동시에 바이이거나 헤테로일 수 있을까? 그것은 게이-부분과 등치되는 것인지 판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일단은, 어렵다고 본다. 그것은 게이와는 많이 배타적인 정체성들이다.)
 
앞서 많은 사람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게이나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입고 말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에서도 그러한 경우가 있던 것으로 안다. 이렇게 정치적 목적에 따라 가시화를 위해표방된 정체성은 사람들이 가짜 정체성으로 매도하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 정체성이 굳이 섹슈얼리티와 같을 필요가 없음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정체성'정체'라는 단어 때문인지 한 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영어로 보면 identity. ident-는 그냥 같다는 거다. 정체성의 중심은 동질성이다. 같은 지점이 많을수록, 동질성이 높을수록 identity는 공유된다.
 
퀴어 정체성은 내가 게이 정체성과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이 아니라면(또 어떤 괴팍하지만 합법적인 필리아를 가지고 있다면…… 미래에는……) 누구든 가질 수 있다.
 
바이섹슈얼-게이는 오히려 성지향성과 성적 정체성의 정체화가 굳이 같을 필요 없음을 알려주고, 바이섹슈얼가시화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바이 정체성은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즉 확장에 도움을 주는 개념이다. 이는 생득적인 기질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제한되어 표현되지 못했음을 드러내며, 또한 이것이 굳이 채워져야만 (행복할 수 있는) 빈칸도 아님을 말할 수 있다(그러나 이를 위해서 디나이얼이나 완전한 클로짓(은둔)과는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
 
개인은 능동적으로 집단에 동질성을 느끼고 이 집단이 공유하는 일반적인 스테레오 타입들을 자신과 대조해보고 동질성을 느끼는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 정체화할 수 있다. , 이 사회적 정체성은 집단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퀴어 정체성은 확장시키는 바이섹슈얼 게이 정체성이, 바이섹슈얼 바이 정체성은 어떻게 지우는?
 
 
8. 바이섹슈얼 바이 정체성
 
드디어 바이 정체성 이야기가 나왔다. “바이섹슈얼 게이는 바이섹슈얼 바이를 지운다.” 그것은 왜인가? 바이섹슈얼 바이의 정체성은 어째서 바이섹슈얼 게이를 외칠 때마다 조금씩 줄어드는가? 특히 트위터에서는?
 
바이 정체성의 형성이 힘들다고 하면, 마치 그렇게 말함으로써 힘들게 만든 것처럼 반응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빨간색을 보면 눈이 아프다고 말하는 것과 빨간색이 눈이 아프니 쓰지 말자고 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이섹슈얼로서 정체성을 구성하기는 꽤 어렵다. 바이가 사귈 수 있는 사람이 꼭 바이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다수를 차지하는 두 집단-헤테로 집단과 게이/레즈비언 집단이 상호배타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위에서 말했던 모노아모리-모노섹슈얼적 몰이해로 인해 바이섹슈얼은 바이포빅한 일을 많이 겪는다. ‘바이는 호모-헤테로 중간의 어딘가이다, 과도기이다, 박쥐다, 바람피는 사람들이다등등. 확실히 바이섹슈얼은 많은 오해를 받아왔다. 그렇기에 확실히 지워졌고(드러내면 이해받지 못했으니까), 그 결과 바이섹슈얼은 여태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다. 헤테로 사회에서는 게이로, 게이 사회에서는 헤테로로 배척받았기 때문이다(아마 당사자들도 둘 중 어딘가에서 길을 헤맸을 가능성이 크다).
가시성이 부족하면 집단은 형성하기 힘들다. 집단이 부재하면 정체성은 형성되기 힘들다.
 
그러나 놀랍게도 트위터에서는 바이 정체성이 형성되고 있다.
 
트위터에서의 바이 정체성은 <바이포비아에 반대하는 바이>로 뭉쳐지고 있다. 바이포빅한 행태를 공격함으로써 바이 가시성을 획득하는 중이다. 이것은 꽤 배타적인 집단 구성 방식이지만 나쁠 건 없다. 그런데, <바이포비아>라는 단어는 샌프란시스코 인권위가 발행한 리포트를 근거로 하는데, (내가 보기엔) 다소 문제가 있다. 이 정의가 틀렸다기보단, 문제의 소지가 몇 개 있다. 긴 리포트에서 하나 혹은 몇 개의 정의만 문제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이 정의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어찌하겠는가? 레위기의 동성애 금지 항목처럼 말이다.
 
내가 문제시 삼는 바이포비아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Automatically assuming romantic couplings of two women are lesbian, or two men are gay, or a man and a woman are heterosexual.
(연인 관계인 두 여성이나 두 남성, 여성과 남성을 보고서 자동적으로 호모섹슈얼이나 헤테로섹슈얼이라고 생각하는 것)
 
2. Refusing to use the word bisexual in the media when reporting on people attracted to more than one gender, instead substituting made-up terms such as “gay-ish.”
(미디어에서 하나 이상의 젠더에 끌리는 사람들을 칭할 때 바이섹슈얼이란 말을 쓰지 않고, 대신 게이-적인등의 용어를 쓰는 것)
 
나는 1에 대해서, “그렇다면 젠더-섹슈얼 교육 이전에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경우엔 혐오-원죄자로 태어나는 거냐?”고 물었다. 대답은 젠더-섹슈얼 교육은 뱃속에서부터 듣는다였다.
그렇다. 이 사람의 가정은 헤테로로맨틱-바이섹슈얼-젠더플루이드 아빠, 우리 퀘스쳐너리-논젠더 아기 분유 좀 타줘!” “알았어, 바이로맨틱-헤테로섹슈얼-시스젠더 엄마!”라고 말하는 집안이었던 것이다. 인식하지 못한 것을 혐오했다는 건 철저히 당사자 입장의 생각이다.
2에 대해서는, 가시성과 언어의 문제다. 우리는 너무 많은 헤테로 커플을 봐 왔고, 이에 반대하여 등장한 호모 커플의 개념이 현재 대척점에 있다. 여기서 바이 커플이 등장하려면 아직 가시화 전략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트랜스젠더의 성중립적 화장실처럼 가시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거다. 깃발은 중요하다).
 
 
게이들이 바이섹슈얼 이레이징을 했다고 주장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현재 바이섹슈얼이 가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분석이다. 그러면서 저 둘을 동시에 주장하는 것은 뭔가? 가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1,2는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 아닌가? 또 바이섹슈얼 가시성은 어쩌면 섹슈얼리티 특수성(멀티섹슈얼 특수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논란이 많다는 거다.
또 만약 바이섹슈얼이란 말을 쓴다면, 호모섹슈얼이 지워진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 <게이니스><바이섹슈얼리티>보다 그렇게나 월등히 강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차라리 <퀴어함>으로 뭉쳐야 하는 것 아닌가?
 
저 정의는 너무나 배타적이다. 대중의 무지함이 혐오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게이/헤테로 커플인가요?”라고 했을 때 아니오, 바이/퀴어 커플이에요.”로 정정 가능한 문제가 그렇게나 포비아적인가?
 
이는 호모포비아에서 일어났던 의미론적 표백바이포비아에서 다시 한 번 일어난 것이다. 공포증을 뜻하는 포비아는 호모포비아에서 한 번, ‘혐오한다는 의미의 단어로 바뀌고, 바이포비아에서는 일정 부분에 한해서 ‘-에 무지하다는 뜻까지 내려간다. (그리고 트위터에서 포비아라는 단어가 어떤 행태로 사용되고 있는지 한 번 보라. ‘이단자’ ‘개새끼’ ‘나 싫어하는 놈’ ‘나쁜 놈정도로 쓰이는 경우도 아주 많다.) (미래에는 포비아가 비속어로 취급될지도 모른다. ‘육시럴 놈을 보라.)
이러한 의미론적 표백은 단어가 많이 사용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기는 하다. “사랑한다좋아한다와 같은 의미로 쓰여서 이제는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최애캐가 100개인 사람도 있는 것이고, “특이점이 이전과는 아예 다른 특성을 지니는 점이라는 의미에서 뭔가 이전 일반과 다른 부분정도로 표백되고 있는 현상과 같다.
 
어찌 됐건, 트위터의 <바이 정체성>은 이 <바이포비아>를 위주로 몰려들고 있다. 바이포비아가 아닌 바이섹슈얼 정체성 선언자는 <바이 정체성>을 획득한다. 안타깝게도 바이섹슈얼이 가시화된 그룹이 (트위터에서는) 저 그룹뿐이기 때문인지, <바이 정체성>을 가지려는 자는 다시 <바이포비아> 정체성을 읊는다.
바이포비아를 물리쳐야 한다는 명분은 좋다. 실제로 대부분의 항목은 바이섹슈얼에 대한 오해를 담고 있으며, 혐오적인 발언 내용도 많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의 존재와, 상대방이 실제로 바이포비아인가를 따지기 전에 미리 바이포비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바이포비아 반대 강령을 읊는 것은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거나 선언을 하고 기독교인이 되거나 잡념에 들지 않기 위해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일이랑 비슷하다. 악의 존재를 상정하고 물리침으로써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또한 워마드의 <여자만을 위한 페미니즘> 정체성을 위해 <똥꼬충> 단어 사용과도 같다. 또한 한남들의 <남성성 획득>을 위한 <김치녀, 메갈……> 사용과도 같다. 이것은 배타적 집단을 상정함으로써 내부를 만들고, 그 개념을 반복·확장하며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다분히 종교적이고 지양해야 할 태도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쓰든가.
 
다시 한 번 어찌 됐건, 혐오-원죄자로 태어난 바이섹슈얼 트위터리안은 <바이포비아 반대> 선언을 통해 혐오-원죄를 씻고 <바이>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 일종의 가시화 전략이다.
 
그런데 여기 바이섹슈얼 게이를 말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는 <바이>란 배타적 정체성의 순수성에 동질적이지도 않고, 바이섹슈얼이 꼭 바이일 필요 없다고 말한다. 위 샌프란시스코 인권위의 조항들을 잘못 먹고 체했다면 충분히 바이포비아로 부를 만한 일이다. “그럼 바이가 헤테로-호모의 중간이라는 거야?” “바이가 헤테로-호모 둘 중 하나를 정해야 한다는 거야?” “너는 바이포비아구나!” (기존 레퍼런스에 의해 판단하는 것까지 잘못된 건 아니지만, 설명해줬음에도 계속해서 바이포비아를 읊는 건 당황스러웠다.)
 
<바이포비아 반대 선언을 안 한 바이섹슈얼>의 존재(성서에 맹세하지 않은 크리스천 같은, 이단자)<바이포비아 반대 선언을 한 바이섹슈얼>의 정체성(당위성)을 지운다. 헤테로와 게이 커뮤니티 둘 다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지 않는다면 현재 바이 정체성은 성립되기 어려우니까. 그래서 바이섹슈얼 게이는 잘못됐다,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내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이는 정체성 형성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거냐? 그럼 진짜로 바이포비아네.” 안타깝게도 나는 바이포비아이고 싶지 않다(그게 무슨 의미이든 간에). 그리고 바이포빅한 행태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며, 이를 위해서 바이 정체성이 필요하다고도 생각은 한다(단지 내가 크게 관심이 없을 뿐이다). 그래서 집단이 정체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해봤다.
 
 
9. 독자적인 섹슈얼리티 정체성
 
집단이 부재하는 경우, 개인은 정체성 형성이 쉽지 않다. identity를 형성하기 위해서 identical한 특질들을 찾아야 귀납적으로 추론해야 하는데, 비교 대상을 모아놓은 곳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정체화하지 않은 개인이 쌓이면 또다시 후발주자는 identity를 찾기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이 경우 사회적 정체성이 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 형성이 어렵고, 가시화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데 바이섹슈얼의 가시화 전략은 지금 너무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며 (내 생각엔) 그다지 옳지도 않다. 공격적인 부분은 좋지만 위 논리대로라면 바이섹슈얼리티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중해야 하는 부분이다. 상대방을 헤테로나 게이로 가정하는 게 옳지 않다면, 바이 혹은 퀴어로 판단하는 것, 심지어는 어떠한 가정도 옳지 않다(나는 딱히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즉 개인은 상대방에게 무관심해야 하며, 바이섹슈얼은 결국 보이지 않는다. (가능할까? 옷과 뱃지는 왜 필요할까?) 가시화는 없이 그냥 이 상태 그대로 간다는 거다.
 
그런데 이는 가시화가 어려운 섹슈얼리티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다. 에이섹슈얼, 폴리섹슈얼……. 이들은 분명히 독자적인 섹슈얼리티들이며, 그렇기에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할 집단이 필요하다. 집단이, 가시성이 부재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집단을 구성해야 할까? 일단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약한 정체성집단이라도 필요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특질들과 선험적인 특질들을 추론해본다. 그리고 타 정체성 집단과 겹치는 부분은 소거하면서 이를 축적한다.
약한 정체성 집단 내부에서 이를 다시 정리한다. 이렇게 모인 특질은 그 집단의 스테레오 타입이 된다. 혹은 상징물(깃발)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집단은 이 스테레오 타입을 통해 가시화를 시도한다. 더 많은 구성원을 끌어들인다.
더 많아진 구성원들은 다시 이 스테레오 타입을 추가하거나 제거하고, 동질성-집단 결속력을 높인다.
 
그러나 분명히 말해두어야 할 것은 이 모든 과정은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의지로 행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타인이 성 경험을 해봐야 당신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는 논지를 악용하여 강압적인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하는 행위에 힘을 실어주고 싶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것은 실제로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본인의 정체성은 가급적 본인의 선택이 많이 반영될수록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사회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냥 내 제안이고 생각이다. 현실성이 없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지만, 무의미한 제안은 아니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바이섹슈얼의 결속을 위해서 바이섹슈얼 게이 타도를 외치는 것은 불합리하고 광신적이다. 이것은 정체성의 영역이며 개인 정체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므로, 특히 바이섹슈얼의 경우, 섹슈얼리티와 일대일 대응시켜야만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태도가 바이섹슈얼에 대한 모노섹슈얼-모노아모리 관습적 몰이해를 확산시킨다고 본다.
 
 
10. 결론 정체성이란.
 
개인의 생득적인 특질내적 인식외적 표현(정체성 선언), 특정 집단과의 동질화를 통해 자기 인식적 정체성으로 축적되고, 자기 인식적 정체성은 개인의 존재 연속 속의 경험에 반향되어 개인-사회적 정체성(퍼스널 아이덴티티)을 형성한다. 이 과정을 정체화라 한다.
 
정체화는 사회 관계와 긴밀하게 융합된 것이기 때문에 주체의 내적 주장보다 사회적 외압이 더 강력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정치적 선언으로서의 정체화도 많이 사회적인 것이다. 그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려면 도덕적 판단, 이론적 근거가 필요하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에서의 정체성 선언은 사실, 당신이 뭐라 할 권한이 많이는 없다. 그것이 혐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정체화는 어째서 필요한가? 주체는 주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밈플렉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밈플렉스를 구성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개인의 정체성 선언은 밈플렉스를 하나의 밈으로 묶어보려는 시도다. 개인은 이를 통해 자신을 다시 정의하려고 하고, 스스로 밈을 만들어내 주변에 흩뿌린다. (그래서 그 부작용으로 인지부조화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고, 세상을 바라보기 위한 디딤돌, 거점, 닻이다. 외부로부터 정체성을 받아들인 개인은 이것을 자기 것으로 체화하고, 다시 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나는 이렇듯 보다 유동적인 정체성 개념을 추가하기 위해, 기존 이론을 최대한 활용한 뒤 필요한 만큼만 부쉈다. 이것은 기존 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이론은 다시 인간에게 영향을 주고, 사람들은 이론에 맞춰서 다시 자신을 구성한다.(각주6) 현재 나온 이론들은 남성-여성에 반대하기 위해 나온 첫 반란에 계속해서 가지를 추가해온 형식이기 때문에(헤테로-호모, 호모-바이, 모노-폴리, 섹슈얼-에이섹슈얼), 성적 정체성, 성별 정체성 모두 상당히 딱딱하고 개념화된 틀 안에 갇혀 있다. 그래서 같은 시스젠더남성 호모섹슈얼안에서도 드랙퀸에서부터 근육공주까지 너무나 다양한 자기 인식이 한 카테고리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이들을 위해 새로운 카테고리를 추가해도 또 맞지 않는 사람은 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유동적인 정체성 모델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다양한 정체성은 중요하다. 타자와 다름이 드러나는 부분은 생득적일 수도 있으나 사실 대부분은 확실한 정체성이 구현되는 지점에서 드러나며, 또한 같음도 같이 드러난다. 그 이전까지는 외연되는-외압된 사회적 정체성에 의해 주체는 내적 지향성에 상관없이 외부에 동질성을 맞춰가기 때문이다. 인지부조화를 막으려는 인간의 성향 때문에, 존재 연속이 길어질수록 정체성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현재는 과거에 대한 열쇠이다(찰스 라이엘)”. 고로 과거는 현재로 가는 문일 뿐이며, 현재도 미래로 가는 문일 뿐이다. 현재는 미래의 거푸집이 아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정체화할지는 또다시 모르는 문을 열어봐야만 아는 것이다.



각주 및 참고문헌

1) 아무것도 담아지지 않은 컵을 빈 컵이라고 부르는 건, 그것이 채워지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2)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새물결(1999), <현대사회의 성 사랑 섹슈얼리티> 앤서니 기든스, 새물결(2001), 정보 제공 : 요사리안님.
3) 비피성연자 (非被性延者) 메니페스토, (http://ezo31202.egloos.com/m/5988668), 글쓴이 - 이조, 자료제공 - 원님 
4) San Francisco Human Right Commision(http://sf-hrc.org/), Bisexual_Invisiblity_Impacts_and_Recommendations, http://sf-hrc.org/sites/default/files/Documents/HRC_Publications/Articles/Bisexual_Invisiblity_Impacts_and_Recommendations_March_2011.pdf
5) 수전 블랙모어, MEME : 문화를 창조하는 새로운 복제자 MEME, 바다출판사(2010)  
6) 이언 해킹의 루핑효과’ (the looping effect of human kinds)에 대한 이야기다.

땡쓰 투 : 허스크님, 제이슨팍님, 토토메리님, 원님, 요사리안님, 마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