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6일 금요일

보수성 이야기 3 - 고통 생산기


고통 생산기

 
1. “흔히, 정체성 정치는 아카데미아 안보다 밖에서 훨씬 더 문제가 된다. 미국의 주류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 커뮤니티는 더 예외적이거나 더 피해를 받는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논쟁하며 () 다른 그룹에 비해 더 억압받고 더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한 초월적 예외주의가 되기 일쑤다(Often, identity politics becomes far more of a problem outside than inside academia. In mainstream gay, lesbian, and trans communities in the United States, battles rage about what group occupies the more transgressive or aggrieved position () In this context then, ”transgressive exceptionalism“ refers to the practice of taking the moral high ground by claiming to be more oppressed and more extraordinary than others).”, Judith Halberstam, <In a Queer time and Place>, 2005, NYU Press, p20.
2. 국교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로마 경제 형태를 비난하는 따위의 현실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아담의 운명적 저주를 받아들였다-다시말해 노예제도를 고상한 개념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하인리히 E. 야콥, 빵의 역사, 203p)
3. 모든 행복과 쾌락은 허상인 반면에 고통은 실제적이다. 따라서 삶은 향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살아내고 견뎌내기 위해서 있다. (...) 우리는 고통을 대가로 쾌락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부정적이고 허상에 불과한 것을 얻으려고 긍정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지불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4. 강렬한 행복은 한순간에 지나가는 감정이다. 누군가 냉소적으로 말했듯이 삶이란 짧은 행복의 순간이 잠깐씩 끼어드는 고통의 기나긴 연속인 것이다. (털없는 원숭이의 행복론, 데즈먼드 모리스, 16p)
 
 
앞선 보수성 이야기 글들에서, 보수주의의 결말은 재화로서의 고통의 발행임을 말했다. 고통의 호소는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보수주의 속의 피해자-주체는 최종 생산물로써 고통을 생산한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인간이 모방하며, 상상한다는 점이다. 고통은 모방되고 상상돼 버린다. 이 넘치는 고통 화폐, 원래 피해자가 명예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양화는 악화로 전락한다. 이 모든 고통 화폐를 명예로 바꿔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것은 고통의 가치를 절대 의심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고통에 응답하는 것을 규범으로 만듦으로써 말이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상상된 고통이다. 상상된 고통은 두 가지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고통과 상상된 피해자의 고통이 그것이다.
다가오지 않은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사실상 지성이 있는 이유 그 자체다. 우리는 고통을 상상하기 위해 존재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행복은 얻어지거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4의 데즈먼드 모리스의 말처럼, 행복은 순간과 순간 사이에만 잠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지향되도록 설계된다. 그러나 고통은 지속되며, 존재한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는 존재다. 전기 철조망에 다가가지 않는 개들처럼, 대부분은 고통이 없는 영역을 구성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그것은 보통 공간으로 상상된다. 미래의 가정, 미래의 사회 등으로. 그러나 이것은 이 비-고통이 실현되지 않은 상태의 반대항으로써 구성된다. 행복한 미래는 고통스러운 현재에서 상상된다.
 
이 고통스러운 현재는 실재의 고통에 의해 실현되는 경우보다, 상상된 고통에 실현되는 경우가 더 많다. 다가오지 않은 고통은 상상되며, 그것을 겪는 것이 불가항력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즉시 고통으로-말하자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육화한다. 스트레스 반응은 우리를 다가올 고통에 회피할 방안을 촉구시키지만, 만약 삶 그 자체가 다가오지 않을 고통으로 인식된다면 이에 벗어날 방법은 없다. 고통 화폐가 마를 일은 없다.
 
두 번째로, 상상된 피해자의 고통은, 어떤 사건의 피해자를 먼저 상상한 다음 그 피해자의 고통에 미리 공감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나의 고통이라고도 말해버린다. 이 행위는 결국 첫 번째 상상된 고통의 가치를 높이기 위함인데, 이를 위해서라도 피해자는 고통스러워야만 한다. 상상된 피해자가 존재하기 위해 사건은 피해로서 구성되어야만 한다. 이 상상된 피해자는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다(동시에, 아무도 이해할 수도 없다!) 어떤 사건의 피해자가 구해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일반적인 피해자는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므로, 상상된 피해자를 상상하는 그 자신의 고통 역시도 진실하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고양이를 보호하려는 여자가 아무리 많은 고양이를 구한대도 아직 고통받는 고양이가 남아 있으므로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 여성의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오직 자신이 구하지 못한 고양이들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성공한 일로 행복해하기 보다는 자신이 실패한 일로 인해서 괴로워했다. …… 협동의 행복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적정한 규모를 설정해야 한다.", 52p.)(보통 종교, 팬덤에서 많이 쓰이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 XX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 상상된 예수님의 상상된 고통에 보답해드려야 한다. 실제로 고통스러웠는지, 이 행동이 보답인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이 상상 체계 속에서만 정합하면 된다.)
 
이 상상된 피해자의 고통까지도 자신의 고통으로 써버릴 정도라면, 고통 화폐는 정말로 무에서 발행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이렇게 즐비한 사태는 가치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존중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고통의 가치를 높이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고통의 환율 고정, 정가제, 바로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다. 고통의 가격은 고정된다. 이것을 깎으려는 시도는 이렇게 생산된 모든 고통의 가치와 관계되므로,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 압력은 사회적이다. 누군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기대를 저버리는 차단점이 된다. 결국 화폐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끼리만의 시장이 구성된다. 스파르타의 쇠막대나 가야의 덩이쇠처럼.
 
고통스러운 사람을 존중하자는 것, 이러한 전략은 일반적으로, 그러니까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는 전반적 유효성을 띤다. 마치 '비쌀수록 좋은 물건이다'라는 통념처럼 뇌가 고생할 일을 많이 줄여줄 것이다. 그렇게 효과적인 기제기 때문에 본능적인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 전체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면, 도시는 환경을 컨트롤할 수 없으며 불의의 악의는 언제나 가능성을 가지므로, 고통의 윤전기는 결코 멈출 수가 없다.
 
특히 트위터에서는 이 고통 윤전기를 돌리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반향실을 형성하여, 누구나 고통을 호소한다. 그들이 회피하는 모든 것들. 세상 모든 것이 고통의 자원이 되고, 이것은 재해석되기 힘들어진다. 새로운 고통 자원을 발견하고, 모두가 이것의 피해자가 되어 고통을 생산하고, 모두가 이것을 서로의 명예로 환전해준다. 더 많은 고통을 가진 사람일수록 세상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진다고 여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X라는 사건이 남자에 의해 일어났을 경우, "여자였다면 부정적이었을 것 /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자에 의해 일어났을 경우, "남자였다면 더 쉬웠을 것 / 긍정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리고 그 부정적 상황들에 자신을 대입하여 손쉽게 고통을 얻는다. 이 바꿔쓰기에 쓰이는 이항대립은 남성/여성, 시헤유/퀴어,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등이 있다.
 
결국 모든 사건이 아쉽고 박탈된 사건이 된다. 모든 원인이 "네가 남자여서" "내가 여자여서", "네가 시헤유여서" "내가 소수자여서"로 해석되고 박수받는다. 다른 의견, 다른 선택지는 생성조차 되지 못한다. 2의 하인리히 야콥의 말처럼, 이들의 고통 생산 헤게모니는 부당함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기보다는 여자/퀴어/저소득층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해진다. 성공한 상황에서는 더 성공한 남성을 상상하거나/찾고, 실패한 상황에서는 실패하지 않은 남성을 상상하거나/찾아서 박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상상하기 급급하다. 이러한 박탈감은 주어진 적도 없지만 날 때부터 박탈된 것에 대해 느끼는 것이다. 이 박탈감이 그들에게 동질감, 소속감을 준다. 1에서 할버스탐이 말했던 것처럼, 오로지 고통을 말하는 것이 이 집단의 목표가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박탈감을, 고통 생산을 코어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존재가 된다. 우울증, 신경증, 결벽증을 가진 이들의 고통은, 문제적으로도, 진짜다. 고통의 그 절대적 주관성 때문에 생성된 고통에 "만약"을 제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그 고통은 언제나 회피 불가능한 참이라는 것이다(분명 그렇지 않을 텐데도). 그리하여 어떤 타인에게는 고통이 아닌 일들까지도 이들에게는 항시 고통이 되기 때문에, 이들의 고통 재화는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고통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타인은 제거되어야 한다. 한 번의 의심조차 허락될 수가 없다-화폐의 신뢰성이 폭락할 테니까.
 
우리는 고통 생산기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우울은 병증이라는 인식은 치료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비정상 상태라는 인식도 낳았다. 그러나 분명 모든 인간에게 우울은 찾아오며, 그 기간과 강도에 있어서 도움이 필요한, 제어불가능한 상태가 있고, 많은 경우 약물로 조절 가능한 상태다. 하지만 이것을 자신의 코어 정체성으로 삼으면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자기부정으로 읽히며(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그렇게 고통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활달한 상태를 지향하는 게 나을 텐데도 말이다), 외부의 극적 변환 없이는 치유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외부는 웬만해서는 바뀌지도 않고, 인식론적으로, 외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애매한 대상이다. 그러니 우울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들에게 있어서 꽤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데-이 상태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의 고통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공포 때문이다. 즉 책임져야 한다는 망상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일은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의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고통스러운 상태는 특수하고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이 고통스러운 상태가 비정상적이라 느끼고 타인의 행복을 상상하여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역시도 특수하고 비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지만, 그것은 피할 수 있는 상태다.

2017년 5월 21일 일요일

보수성 이야기 2 - 이것은 페미니즘이다

(이 글은 1703월쯤에 썼음을 밝혀둠)

이것은 페미니즘이다 Ceci est le feminism


위대한 페미니즘의 앞에서 사람들은 억압으로써 세례받고,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그리고 #내가_메갈이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한 명의 페미니스트로서 다시 태어났다. 남성들은 사람이 모두 평등하다고 말하면서도, 여성을 열등하게 취급했다. 역사 이래로 시작되온 여성혐오가 백일하에 지목되었고, 여성들은 이를 깨달음으로써 분노해야 할 이유를 얻었다.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중간에 있는 것은 중립이 아니며, 페미니스트가 아닌 자는 한남 아니면 명예자지였다. 심지어 페미니스트조차도, 여성혐오 사회에서 태어났기 에 원죄를 완벽히는 씻을 수 없으며, 계속하여 혐오에 저항함으로써 속죄해야 했다. 특히 더 많이 죄지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인정을 바라지 말고 끝없이 속죄하여 광명을 찾을 일이었다. 그 대가는 페미니즘의 세상이 올 때 모든 것이 평화로워짐으로써 받게 될 것이었다

이분법은 강하다. 쉽고 명확하며 고민할 것 없이 적을 물리쳐나가면 된다. 이는 대중운동에 있어서 가장 큰 장점이다. 아무리 무학자라도 이쪽과 저쪽, 내 편과 네 편이라는 개념은 알고 있으니까. 참여하기 쉽다는 것은 큰 흐름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폭력시위보다 비폭력시위가 더 높은 성공률을 보인 것1)은 참여하기 쉽기 때문이다. 말 많은 온건주의보다 구호 몇 개의 과격주의가 쉽게 득세하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1)    “The central contention of this study is that nonviolent resistance methods are likely to be more successful than violent methods in achieving strategic objectives.“, <Why Civil Resistance Works>, Maria J. Stephan and Erica Chenoweth, nternational Security, Vol. 33, No. 1 (Summer 2008), pp. 42.

2016년 이후의 페미니즘이 종교화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피해자의 존재다. 피해자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다. 고통을 부정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무심할 수 없다. “공감은 아주 강한 반응 중 하나로, 실제로 유인 원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바나나에 대한 욕구보다 강하다.”2). 고통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 있는 것이다. 고통은 마치 단 하나의 절대적 교환가치처럼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인과응보와 tit for tat의 유전자를 지닌 존재로서 은인과 원수를 잊지 않는다. 양심의 소리, 죄책감, 죄의식, 수치는 우리를 약자와의 연대로서 보답하게끔 만든다. 우리는 피해자에게 속죄한다. 그이는 우리 대신 고통을 지불했다. 그이가 아니라 내가 당할 수도 있었다. 그이는 우리를 대신했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그이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 이것 은 너무나 강력한 감정이라 이를 깎아내리려는 모든 시도는 우리를 분노하게 만든다. 피해자 의 피해가 사실이냐고 묻는 것은 피해를 부정하려는 시도로서 읽히며, 고로 가장 사악한 시도가 될 것이다. 의심은 신성모독이다.

2)    내 안의 유인원, 프린스 드 발, 김영사, 2005, p265

피해자는 옳다는 도그마가 트페미니즘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이것은 사실 별로 새로운 논리도 아니고 이미 여러 번 되풀이 된 것이다. 예수가 인간의 평등함을 주장할 때 그는 피해자로써 죽었고, 프롤레타리아가 시민의 평등함을 주장할 때도 그들은 부르주아에 착취당하는 피해자로써 고통받았다. 예수와 그 사도들의 진언, 노동자와 민중의 부름은 각각 그 고통의 대가로서 요구될 수 있었다. 여성의 목소리는 현재 고통을 겪은, 겪고 있는-피해자에 의해 주장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거부할 수가 없다. "피해자"는 하나의 신성으로 기능한다. 개별 사건의 피해자들은 각자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더 강하게 만드는 이콘을 진다. 피해호소인은 피해사실을 호소함으로써 매우 즉시적으로 이콘을 가지게 됐다. 이에 의심이나 보류를 제기하는 자는 "페미니즘의 적"이었다.

사법처리와 공권력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보통 트페미니즘은 그것을 믿을 수 없기에-그것은 철저히 남성을 편들 것이기에 거부한다. 그렇다면 그 선언-피해자를 위한 보상과 가해자를 위한 처벌은 누가 하겠다는 말이었을까? 그것은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사실 처음부터 내정되어 있던 것 같다.
여러분은 정의롭고 윤리적인 처벌자를 참칭했다. 왜냐면 "" 또는 "페미니스트"는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적 처벌이 아닌 사적 처벌을, 개개인이 직접 상응하는 처벌을 한다면, 심지어는 그것이 직접적인 피해자도 아니고 피해자에 "연대"한다는 자의적인 레테르가 부여된 사람이, 가해지목인에게 생계와 명예와 정서에 압박을-무형의 폭력을, 공적 재판을 거부함으로써 그 모든 개인이 모두 각자의 도덕률에 의거해 내적 재판을 진행하고, 그 결과로 나온 게 저 행동들이었다면, 그것은 정당했나?

여러분은 이 재판을 위해 페미니즘과 PC라는 공적 판단의 권위를 빌려왔지만, 그것은 허상이다. PC와 페미니즘은 그저 수백 가지 질료 중 하나일 뿐이다. 당신은 페미니즘적 PC 기계 가 아니라 오래간 한국에서 살아온 인간이다. 그 판단은 페미니즘의 판단이 아니라 당신의 판단이며, 책임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당신이 진다. 당신이 만든 실수라면 당신이 갚아야 할 것 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의 법은 눈을 찌른 자에게 죽음으로 갚았던 "복수"를 억제 하기 위함이었다. 이 복수에게 저울을 주어 정의로 만든 것은 인과응보를 최대한 공정하게 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이었다. 개인 사이의 폭력은 금지됐고 인간에 대한 폭력은 범죄가 됐다. 우리가 누누이 적을 평면화하고 악마화하는 것은 인간의 지위에서 떨어뜨리기 위함일 것이다

사람들은 가해자, 여혐러, 퀴어포비아가 마치 판에 박은 듯 똑같다고들 말한다. 거대담론과 이분법의 결합은 적을 악마화하고 세계를 피해자적으로 구성한다. 모든 거대담론은 그 악마된 존재에 의해 세계가 타락해 있고, 유일한 구원은 이를 물리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 방식은 "우리가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이 하고 있는"3) 것이다. 이단과 반동분자 와 한남은 같은 기제에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누군가의 의견이 선의와 참신함으로써 시작하 더라도 극단주의만을 고수한다면, 극단은 그 참신함을 유지하기 위해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을 빠르게 보수화시킨다. 반대 의견은 말 그대로삭제당한다”.

3)    대니얼 파이프스에 의하면 음모론자의 주장은우리가 틀린 게 아니라 저들이 속임수를 쓴 것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음모론의 패턴들 : 진실은 저 너머에>, 조지 케이스, 스켑틱 Vol.2, 2015. (<Conspiracy - How the Paranoid Style Flourishes and Where It Comes From>, Daniel Pipes, 1999의 내용.)

고로듣기 좋은 말외의 모든 것은 사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즉 이미 정해진 코드, “피해자로서의 여성갓치(유사-남성성 추구자)”만이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워마디즘-트페 미니즘이 여성을 영원한 피해자로 규정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보수주의가 여성에게 영원한 수동성을 부여하는 것과 협치한다.

그리하여서, 이것은 과연 페미니즘인가? 물론이다. 이것은 페미니즘이다. 그렇게 불렀으므로 그것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일 수가 없다. 여러분이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불러낸 것은 사적 처벌이었다. 그것이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왜냐면 여러분이 그 당시에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칭했고, 그 행위를 페미니즘이라고 불렀으니까. 누가 그것이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다"라는 언명이 어떻게 페미니즘 이라는 글자 앞에서 칼리그램으로써 기능할 수 있단 말인가?

페미니즘은 여성주의로 번역된다. 페미니즘이라는 레테르의 중심은 여성이다. 세분화되는 수많은 갈래가 있지만 모두 기본적으로, 여성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여권을 신장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남성 권력을 타도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여성이 권력을 획득한다는 것 인가? 이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적어도 어떤 소수자들에게는 철저히 다른 문장이다. 현대 사회에서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경우가 대부 분이다. 여기에서 페미니즘적으로 옳은 길을 택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지닌다. 첫째로, x축만을 상정하는 좌표는 극단주의적이다. 둘째로, 여성 자신이 주장하는 것이 곧 옳다는 믿음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상정하는 여성은 제한적인 범위의 여성이다.

극단주의는 언제나 한계적이다. 문제를 한 가지 기준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다분히 폭력적으로 변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극단적인 자연주의를 예로 들어보자. 인간을 비-자연으로 상정해놓는 경우, 가장 자연주의적인 것은 인간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 말은 마치 극단주의를 비난하기 위해 지어낸 말처럼 들리지만, 자발적 인류 멸종 운동(voluntary human extinction movement) 같은 예시는 존재한다
극단적 여성주의에 있어 남성을 비-여성으로 상정해놓는 경우, 가장 여성적인 것은 남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과도한 주장 같은가? 이 는 여성 공동체나 레즈비어니티 등의 방식으로 이미 서구에서 시도된 것이다. 또는 남성성을 문명 전체로 보고 자연적인 것들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에코페미니즘은 어떤가? 오로지 나의 극단주의만이 그럴듯해 보인다. 극단주의는 한 발짝만 떨어져서 보면 우스우며, 위에서 말했듯 이분법적 구조를 역사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극단적 여성주의가 필요한 시간과 공간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사안에서 이것이 "오직 유일하고 위대한 법"으로써 다루어지며, 가장 큰 문제는 이 여성성이 철저히 "", 즉 몸이 라는 물질성에 기반한다는 점에 있다. 래디컬 페미니즘-그리고 그 한국적 변용인 워마디즘과 약간의 리버럴이 섞인-트페미니즘에서도, 많은 부분이 몸, 물질성에 기반한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나뉘어진 남녀 이분법에서 각각은 다시 이분법적 특성을 부여받는다. 피해자와 가해자, 착취자와 피착취자, 지배와 피지배, 심지어는 옳고 그름까지도 남자와 여자에게 각기 귀속된 다. 생물학적 여성은 피해자이며 옳다. 이것은 중력이나 인력만큼이나 이 세계관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다.4) 이것을 거부한다면 그이는 안티 페미니스트라는 스티그마-레테르가 찍힌다. 그가 여성일 경우 명예자지의 레테르라도 씌워 남성성이 부여된다.

이분법의 저쪽으로 치워진 그이의 말은 이제 모두 그르다. 물질성에 기반한 페미니즘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이 시점에서 얼마나 퇴행적인지에 대해서 반드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반전된 가부장제는 퀴어들에게 그저 새로운 나라님일 뿐이다. 특히 퀴어, 그중에서도 게이들이 이 시류에 휘말리는 것은 개인적으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사상은 당신들을 부정하고, 그 부정이 바로 게이들이 원하는 것이며, 나는 그게 본인들에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시태그 사건 때 휘말렸던 사람 중 한 명으로 번역가 H가 있다. 그이는 "여교사가 남학생 에게 당한 불쾌함 같은 것은 지금 올려선 안 된다"는 의견을 트윗했고, 당시 사람들은 여성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막는다며("남자가 여성에 대해 뭘 안다고 가르치려 드냐") 그에게 여혐게이라는 레테르를 씌워 비난했다. 본래 적극적으로 안티페미니스트 입장을 말하던 게이들에게 붙이기 위했던 호칭인 여혐게이 는, 게이들의 여성 호칭이 여성 비하이며, 이것이 광범위하게 쓰이므로 이 호칭을 쓰지 않아 야 비-여혐게이, 페미게이가 될 수 있다는 함의를 담게 되었다(또다시 이분법적 논리다). 
여혐게이라는 레테르가 담은 의미는, 지난 세기의 게이 컬쳐가 모두 여혐 정서에 기반하여 쌓아 올려져 있다는 것이고, 자신을 여성으로 지칭하는 게이는 여혐적 정서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것의 근거는 "게이는 남자이므로 자신을 지칭할 때 남성으로써 지칭 해야 한다. 그는 "시스젠더 남성"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5) 게이가 시스젠더라는 말은 다분히 신화적이다-“에 대해서 모르는 게이도 있나?

4)    레이코프와 존슨(G Lakoff, M Johnson, <Metaphors we live by>, Chicago: U of Chicago P, 1980)에 의하면 우리는 추상적인 것을 은유적으로 구조화하여 이해한다. 내 생각에, 워마디즘-트페미 니즘은 페미니즘을 폭력과 착취, 전쟁과 혁명으로써만 구조화-이해한다. 이것은 페미니즘의 투쟁과 생존의 맥락은 강화하지만, 공영이나 평화의 맥락은 은폐시킨다.
5)    하지만 이러한 카테고리가 경험을 파악하려는 도구가 아니라 (공적으로) 타당한 경험으로써 보일 때 위험은 시작된다. (…) 그러나 이것은 그저 모델일 뿐이라는 걸 인지해야 한다. 모두의 경험을 설명해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Yet a danger arises when those categories come to be seen as valid descriptions of experience rather than as tools used to apprehend that experience. (…) but it should be recognized that this is still only a model; it does not describe everyone’s experiences).”, David Valentine, <GLQ: A Journal of Lesbian and Gay Studies 10.2>, 2004,

젠더가 온전히 섹스로 환원되는 이 시각이 트렌스젠더에게조차도 긍정적인지 의문이다(비수술 트렌스젠더를 "증명"하라고 할 테니). 
게이가 남자라는 주장은 대단히 의심스럽다. 우리는 일반적 남성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게이"라는 유사-종족적 개념을 형성했고, 남성성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났다. 물론 시헤유남이라도 모두 남성성 기준을 충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비율의 차이는 우리가 익히 체험해봤듯, 매우 다를 것이다. 게이 안에는 남성 여성성6)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호명하기 위해 이전 세대와 지금 세대의 게이들이 자신의 호칭할 때 ", 여자, 암캐, 보지"를 사용 하는 것을 여혐으로 모는 것은, 매우 많은 것을 무시하고 있는 주장이다.

여성의 당사자성을 불러오면서 그것을 유일한 현실로 만들려는 시도는 당사자성에 대한 폭력이다. 흑인, 아시안, 히스패닉, 여성, 성소수자, 그리고 심지어 남성까지도 당사자성은 존재 한다. 게이 당사자가 자신을 ''이라 호칭하는 것에 대한 편안함은 "여성이 기분이 나쁘므로 틀리다"는 주장을 수용해야 할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의 요구"를 받는다. 여성의 당사자성을 근거로 게이의 당사자성을 뭉개는 것은 웃긴 풍경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위에서 말했듯 물질적으로 게이가 남성이기 때문이며, 남성은 틀렸기 때문이다. 게이들이 이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이 남성성을 선망하기 때문이다. 여혐게이가 아니 기 위해 게이는 남자말만 써야 한다! "나는 여혐게이가 아니다" "일틱입니다" 또는 "남자니까 남자 좋아합니다"와 얼마나 거리가 있는가? 이 워마디즘-트페미니즘에 의해 게이가 남성성을 추구하는 것은 정당화된다. 워마디즘-트페미니즘은 일틱근육강탑을 긍정해준다. 남성성을 추 구하는 게이의 욕구는 래디컬한 이분법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되며, 고로 둘은 협치한다. 여혐게이는 새로운, 오로지 부정적인 뜻으로써의 끼순이다. 드랙퀸, 끼순이, 크로스드레서가 여성 비하적이라는 주장은 그들의 젠더 정체성을 전혀 고려해주지 않은 채, "여혐"으로서 수용된다. 이것은 명백히 디나이얼을 만들어낸다. 남성 여성성을 배척하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남성을 배척하는 "맨박스"를 구성한다. 평소 페미니즘이 남성을 해방시킨다고 말하던 바로 그 부분이다.

6)    남성이 가지는 여성성을 말한다. <Female Masculinity>, Judith Halberstam, Duke University Press, 1997. p215.

워마디즘-트페미니즘은 어째서 젠더 이분법을 강화시키는가? 그것은 그들이 권력을 부수는 게 아니라, 빼앗고 싶기 때문이다. 성을 부수지 않고 주인을 바꾸고 싶기 때문이다. 기득권과 소수자를 동시에 공격하는 것은 그런 기제에서 나온다. 그들은 한없이 보수적이다. 그리고 그들의 보수적 세계관 속에서 여성은 무 형의 무언가-여성성-가 아니라 유형의 몸, 물질적인 몸으로써 정의된다(당연히, 신경 써 본 바 없으므로). , 그들이 말하는 "여성이 권력을 얻는다"는 것은, 생물학적 여성이 남성성을 가지는 것이다.

워마디즘-트페미니즘이 어째서 "미러링" "한남 패기"에 집중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미러링은 기존 폭력성을 띤 남성성 내러티브에서 주체-객체를 바꾼 것이다. 이것은 남성 의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노출시킨다. 이것이 원목적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효과다. 그런데 여성이 남성성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또한 다른 기능이 있는데,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그 순간의 여성이 "남성성"을 가지는 것-"남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시키기 때문이 다. 그리고 이들은 그것을 바란다. 왜냐면, 남성성은 "좋고 가치 있는 것"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라난 사회에서 옳고 장려되는 가치, 남성성이라는 사회적 선재화에 대한 우리의 정향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여성이 남성성을 행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다. 이것은 남성성을 둘러싼 여성과 남성의 갈등으로써, 우습게도 "남자 여자 편 가르지 말아요"라는 나이브한 외침은 이 문제를 가장 간단히 설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말은 페미게이들이 페미니즘의 불독을 자처함으로써 "남성과 다양한 소수자들도 이득을 보는" 것으로 포장되어 논파되지만.) 남성과 여성이 역할이며 남성성과 여성성이 각각의 성에 귀속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이 남성성의 전복이 시도됨에도 불구하고, 워마디즘-트페미니즘은 여성성을 혐오함으로써 남성을 남성성의 틀 속에 가둔다.

 워마디즘의 게이와 MTF, FTM이 배척되는 것은 이것으로 설명된다: 트렌스젠더들은 몸의 이분법적 물질성을 교란시킨다-MTF "이해할 수 없는 자"(혐오스러운 여성성을 원하므로), FTM "배신자"(물질적으로 몸을 남성으로 바꾸므로). 게이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지닌다(물 질적이고 남성이고, 다소간의 혐오스러운 여성성을 표출한다). 래디컬-워마디즘은 물질적 남성과 여성성을 증오한다. 젠더의 스펙트럼은 부정된다.

이 기류 속에서 레즈비언은, 여러 번 지적되었지만, 타자화되어 선망된다. 그들은 여성 남성 성을 지닌 여성이다. 그 핵심을 형성하는 것은 욕망하는 것의 남성성과 욕망 당하는 것의 여성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욕망은 남성성으로서 해석되며, 야욕이 넘치는-많은 소유권을 원하는 것은 남성을 남성으로 만든다. 그중에서도 가장 남성적인 것은 여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워마디즘 은 그 확고한 남성성 획득을 선망하지만, 그것은 이들이 사실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사상적 기반이 철저한 보수주의임을 앞서 밝혔듯, 이들이 원하는 것은 남성을, 욕망하는 것과 동시에 보수적 여성성으로서 소비하기-욕망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이분법의 세계에서 욕 망 당하는 것은 곧 착취, 특히 남성에 의한 착취다. 그리고 심지어 욕망하는 것조차도 남성의 물질적 몸이라는 혐오스러운 대상을 욕망한다는 아이러니를 낳고 만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 여성으로서의 굴복이며 가부장제-한남에의 패배다. 피해자적 세계관 때문에, 그들은 물질적 남성에게 욕망 당하는 것에 공포를 느낀다. 결국 가능한 것은 욕망의 미러링, ‘욕망의 모방7) 이다.

7)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르네 지라르, 김치수, 한길사, 2001.

욕망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 역시 보수적 세계관에서는 어떻게든 잘 융화되지 않는다. 이들 은 "고분고분한 남성"을 원한다고 하지만, 이들에게 남성성이 거세된 남성을 소유하는 것은 그 다지 매력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들은 남성 여성성을 혐오한다. 남성성을 가 진 남성, 그것만이 가장 욕망된다. 이 두 가지의 모순은 디나이얼의 정서를 형성하며, 분리주 의적이거나 정치적 레즈비어니즘으로 결과된다. 이 정서는 "시녀, 흉자" "갓치" 등으로 표출 되며, 욕망은 "양남"이라는 우회로를 택한다. 우습게도-정말로 페미니즘을 위한 "수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게이들이 몇십 년 전부터 앓아온 남성성 중독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남"으로 대표되는 "빻은 남자"들의 직관에서도 어느 정도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기는 했다. 그러나 지적당하는 것은 본래 상하관계를 형성하므로("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으로 써. 맨스플레인 역시 같은 원리의 지배 시도임을 생각해 보라) 이들은 이것을 거부했다. 논리 적 판단 이전에 이는 ""의 기분이 나쁘기 때문이며, 고로 ""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 "여성"이다. 여성이 원하지 않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거꾸로 "여성" ""가 원하는 것은, 이로써, "페미니즘"이 된다. 특히 "" "페미니스트"라면, 그것은 심지어 "페미니스트 운동"이 기까지 하다. 그리하여 이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즘적 권위를 주는 성배는 "여성의 몸"이다. 여성의 몸이 원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는 논리는, 사실 신의 종인 나를 움직이시는 것은 신의 뜻이며 신께서 원하신다(God wills it)와 다른 논리는 아니다. 레테르-정체성으로서의 페미니스트는 그 자신을 "현현된 페미니즘"으로 만들어버린다. 피해자의 신성, 더불어 여성의 몸이라는 신성은 "의심" "비판"을 원론적으로 차단시킨다. 이자혜 사건 등에서 의문이나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특히 시인 A) "안티페미니스트" 낙인을 찍히게 되는 것도 본보기로써 효과를 보였을 것이다. 그 사이에 낀 존재들은 철저한 비체로써 무시되었다
이것은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원할지 몰라도,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