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3일 토요일

2019년 3월의 인터넷 세상

(제목: 우리 사는 하나 뿐인 쓰레기장)

해를 거듭할 때마다 트위터 자체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던 거 같다. 처음엔 친목을 위한 소소한 '사이트'였고, 다음엔 어쩐지 의로워 보이는 이들이 모인 사회적 공론장이었으며, 다음은 식별표를 달고 패싸움을 하는 모두가 미친 장소로 보였고... 그리고 지금은 그냥 말도 안 되는 무한한 넓이의 쓰레기장으로 보인다. 쓰레기장은 나름의 생태계를 형성한다. 남은 영양을 찾아 먹는 까마귀, 너구리, 개(대부분 웰시코기)와 고양이와 곰이 있다.
그리고 유령이 있다.
2019년 3월에 아직도 트위터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쓰레기장에 몸을 뉘였다는 이야기다. 이곳에 있는 말들은 저밖에서 뭔 가치를 지녔었든 하나의 쓰레기가 됐다. 그 내용적으로 쓰레기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판단해야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쓰레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든 말이 쓰레기라니, 내가 만약 그 쓰레기 생산자의 하나라면 이는  양비론적을 통한 책임회피에 불과하지 않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것은 나쁘다. 쓰레기를 버리는 것도 쓰레기를 버리는 것밖에 없다고 정당화하는 것도(아니 쓰레기장을 떠나면 되잖아? 하지만 바깥의 청정한 환경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겠고).
이 글에서 나는 트위터에서 사는 사람들은 나쁘고 나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저급수에 적응해버린 사람들이라서.
그런데 나쁘다는 판단은 무엇인가? 해당 행위를 하지 말거나 수정해야 한다는 판단을 선언한 것이 아닌가? 이 트위터라는 쓰레기장에서는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것이 나쁘다 하더라도, 안타깝게도 달리 바꿀 방법이 없다.
사람들이 트위터에서 한 말에 책임을 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책임을 진다면 당신이 쓰레기를 버리는 장면을 걸렸을 때 뿐이며 그조차도 쓰레기가 아니라 쓰레기를 버린 당신이 누구인가에 따라 죄악의 근수가 달린다. 또한 주목됨의 정도에 따라서 그 값이 곱해진다(주목되지 않으면 줄고, 지목당하면 는다). 무엇보다도 흐름에 맞춰야 한다. 저마다 타고 있는 플로우에 맞추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상대적으로 거꾸로 가게 되기 마련이다. 엄청나게 많은 붉은 여왕들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쓰레기장을 돌린다. 그 결과 제자리에서 이리저리 새로운 쓰레기들이 생성된다.
이 나쁜것 구분법과 쓰레기 생산법은 나한테는 좀 이상했다. 본 내추럴 아싸라서 그런지 트위터에 제대로 들어가자마자 한달만에 싸우기 시작했다. 16년에는 어떤 조직된 논리를 만들면 될 줄 알았고(정체성) 17년 상반기에는 그들이 했던 말을 다시 보여주면 될 줄 알았으며(미지) 하반기에는 서로 쓰레기로 인정받은 것으로부터 쓰레기임을 구분하게 하면 될 줄 알았다(블쉐가이드). 모두 안 됐고, 내가 만든 쓰레기도 많았고, 나 자신도 쓰레기임을 깨닫고, 18년에는 결국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쓰레기를 던졌다. 근데 그것조차 별 의미는 없었다.
갈수록 쓰레기의 양만 훨씬 많아졌고 어떤 방식으로건 나와 당신들은 쓰레기에 압사당하거나 헤엄쳐 나오거나 했다. 움직이기엔 너무 거대하고 영향받지 않기엔 너무 거대하다.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교훈을 짜내 보자. 사람들이 쏟아낸 말들, 쓰레기장에서 쓰레기의 주인들을 찾아주려 노력해도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 쓰레기를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서 뭔가를 재활용해내지만, 그것이 정말 쓰레기보다 가치가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순식간에 다시 원래 조각들만큼의 조각으로 무너진다는 것도, 그리고 계속 그런 게 만들어진다는 것도 알았다. 이걸 알았다고 말하는 것조차 의심스러운 일임을 알았다.
이곳의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고 궁극적으로 쓰레기로 환원되어 버린다. 그런 쓰레기들이 이곳에 자유롭게 버려지고 방치되며, 당신은 쓰레기로부터 잘 구분되지 않는다. 당신은 분리수거되지만 재활용되지는 않는다. 게토의 주민들이 또는 혼자 사는 괴짜가 각자의 매립과 각자의 소각을 한다. 만인이 만인에게 쓰레기호더다.
이 트위터 속에서의 '쓰레기됨'은 물리적 필연인 거 같다. 다른 SNS나 인터넷 플랫폼보다도 심한데,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꼽아볼 수 있겠다. 하나는 당연히 분량의 제한이다. 분리수거할 때의 쓰레기가 작은 조각으로 분쇄되듯이 1~140자 사이의 토막으로 조각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언어는 한 장의 사진과 다름없으며 실제로 사진의 포맷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모두가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다른 플랫폼의 쓰레기는 대형 생산자가 점차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는 듯한데 여기는 이상하게 더더욱 파편화된다. 언제나 일정한 콘텐츠를 내놓는 사람은 정말 드물고, 그때그때의 플로우에 맞추어 알맞는 쓰레기를 내놓는다. 월요일에 한 말과 금요일에 한 말이 완전히 반대되더라도 쓰레기 내놓는 날만 잘 맞춘다면 어쨌든 괜찮다. 셋째는 쓰레기 간의 환전불가능함이다. 누군가 쓰레기의 가치를 찾아내도 그것은 찾아낸 지역의 고유 화폐다. 게토 바깥에서는 환전되지 않는다. 게토 바깥 쓰레기의 유일한 소용은 똥 닦는 휴지 그러니까 인용알티/캡처박제 정도다.
여태 게토라고 말하던 것을 공중화장실로 생각해보자. 이 공중화장실은 같은 쓰레기상하수도를 공유하는 개인화장실의 집합이다. 아무래도 트위터에서 지금 가장 공고한 것은 이 공중화장실인 거 같다. 십중팔구는 이 공중화장실에 정착하며 부적절한 쓰레기가 들어올 틈을 벽돌로 막는 것만이 지속적인 고통으로부터 탈출하는 유일한(트위터를 떠나는 일을 제외하면) 방법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 뿐 그저 투병 기간을 연장시키는 역할인 거 같지만, 역시 최선은 최선이다.
그곳이 종착역이다. 트위터라는 무한 쓰레기장에 처음 입장한 사람들은 저딴에는 반짝이는 파편들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다니거나, 그 조각을 새둥지처럼 모아 자신의 거처를 만든다. 그리고 거처 바깥은 위험하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거처 안에서 똥을 싼다. 쓰레기를 모아와서 똥을 닦아 다시 쓰레기를 버린다. 그러니 그곳은 화장실이다. 집이 화장실이 된 게 아니라 화장실을 집삼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화장실이 어느 순간 이 공중화장실의 일부라는 것에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끼는 듯하다.
물론 화장실도 깨끗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람이 머문 자리는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다운 사람이 계속 똥을 싸고 있다면? 또는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게 사실 머무른 다음에나 판단되는 거라면? 그러니까, 떠나질 않는다면? 심지어는 화장실이 공개되어 있어 아무나 머물러 똥을 쌀 수 있다면? 그걸 실질적으로 치울 수 없다면? 그러고도 여전히 내가 화장실에 산다면? 뭐... 싸면서 동시에 어떻게 치울 방법이 있긴 한가?
결국 쓰레기는 집적된다. 그게 끔찍하다면 화장실에 살지 않거나 또는 살아서 화장실에 있지 않는 방법, 또는 출입을 통제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사전예방이지 사후처리는 아니다. 읽은 글은 안 읽어질 수 없다.
치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하다. 트위터는 화장실들이 모인 아주 커다란 쓰레기장이고, 처리하는 방법은 사실 여태까지의 경험상 한 가지 뿐이었다.
모든 지면이 새로운 쓰레기로 완전히 덮이는 것이다.
그동안 트위터에서 나 또는 우리는 아주 많은 주제와 집단과 인물과 사건과 시간을 소비했는데, 그것들은 데이터 지층 아래에 깔려 있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친 것 같기는 하다. 무슨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볼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많이들 알다시피 새로 쌓이는 말들 아래로 파고드는 건, 그런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하나하나 따지고 반송하는 일은, 매우 무효하고 헛된 일이었다. 지나간 일들은 복권되지 않았고 개중에는 여러 모로 옳았던 일, 옳았지만 아쉬웠던 일, 안타깝고 잘못됐던 일도 있었고 완전히 망한 일도 있었다. 완전히 망한 일들을 되살리는 일, 실패해서 바닥에서 처박힌 걸 끄집어내려는 일들은 또 실패했다. 그런 일을 집어내려 했다는 일조차 다시 묻혀서 아무도 기억하질 못했다.
나는 쓰레기에 묻혀서 다 망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안 그랬다. 그냥.... 묻힌 곳이 다시 지반이 됐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가장 위쪽에 떠 있다. 물이 얼마나 깊든지 언제나 수면으로 떠오르는 플라스틱 쓰레기처럼. 게다가 신기하게도 완전히 망했던 일들이 덜 망한 일이 되어 되돌아오거나 아예 망하지 않게 되기도 했다. 똥 묻은 쓰레기들이 새로운 쓰레기들에 모래 필터처럼 정수되어서, 똑같은 쓰레기를 봐도, 옛날에 누가 그걸로 똥을 닦았다는 것조차 아무도 알아차리질 못했다. 이 아래에 뭐가 있다는 것조차 기억을 못했다.
물론 그와 얽힌 많은 시도들도 함께 잊혔고 똥조각이 남거나 다시 똥을 싸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시간이 흘렀고 그게 다 희석돼 버렸다.
이게 뭐람? 영원할 줄 알았던 일들도 그냥 쓰레기1이 됐다. 상당히 허무한 결과였다. 심지어 반복되기까지 했다. 마치 고대 사회에서 매 절기마다 치르는 행사를 우주의 탄생과 파멸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산을 떤 것이다. 그저 거기에 불행하게도 제물로 바쳐지고 땔감으로 바쳐진(또는 땔감이 되기를 자청한) 사람들이 있다. 이 모든 게 우주의 순환의 일부였다니?
여기까지라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이상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 나보다 훨씬 오래 머문 사람들도 있는데, 왜 저 사람들은 이걸 그렇게 열심히 하나? 이 모든 걸 봐놓고도 어떻게 매번 똑같을 수가 있을까? 더 단단해지거나 닳아 없어지거나 한다는 징후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들은 무엇을 목적하기에 같은 상태를 고수하는 걸까? 또는 무엇을 성취하려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저들은 왜 저리 열심히 쓰레기를 버리고 흐름에 매달리나?
어쩌면 시간이 흐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해리 포터에 나오는 모우닝 머틀은 여자화장실에서 죽은 유령이다. 그 유령들은 자신이 죽었다는 걸 알지만 죽음의 순간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고, 죽은 뒤로 지식이나 감정을 크게 변화할 수 없다. 또한 롤링이 딱히 설정해놓지 않았는지, 사후세계로 건너갈 수 있다는 표현이나 암시도 등장하지 않는다. 성불하지 못하는 유령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모우닝 머틀은 울고 비명 지른다. 억울하고 분노스러우니까. 언제까지? 누구도 고통의 할당량을 설정해놓지 않았다.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 한계도 없고 동기도 충분하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모우닝 머틀이 있고, 그들의 불행은 모두 동일하게 환원되므로 그들의 울음에 반향되듯 또 울어야 하니까. 모든 머틀이 울어야 할 이유가 된다.
무한한 여자화장실에는 무한한 모우닝 머틀이 있다. 그들은 자기 화장실을 유지한다. 스스로 어떤 시간과 상태에 고정시키고 모든 쓰레기를 똑같이 대한다. 내용을 구분하는 게 아니라 형식과 출처를 구분한다. 이것은 적합한 울음인가 아닌까? 이미 울고 있기에 울음의 방향만 정하는 과정이고 방향은 항상 흐름에 맞춰진다. 다행히도, 이미 죽었기 때문에, 적어도 두 번 죽을 일은 없다.
하지만 고통이 끝나지는 않는 거 같다.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블락하는 것이다. 그리고 트위터를 떠날 수 없다면 그냥 게토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걸 부수자고 말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한 거 같으니까.
게토는 쉽다. 게토에 정합되는 올바른 일과 그 바깥의 나쁜 일들로 모든 쓰레기가 분류된다. 게토 바깥의 모두가 나쁜 행위들을 하기에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게토를 강화한다.
무한 쓰레기장은 제어 불가능하고, 플로우는 최대 하루에 세번에서 최소 일주일의 세번씩은 바뀌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보다 작은 공중화장실에서 흐름을 견딘다. 이곳은 관습법 같은 방식으로 어느 정도 제어가 된다.
너무 거대한 것은 나와 하나될 수 없다. 나는 소모되는 세포 하나다.
좀 더 조그만 공간에서는 팔이나 다리 정도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책임이나 의무 같은 게 재생되어버린다. 자리를 지키기 위해 뛰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엔 화장실에 있기 위해 화장실에 있는 화장실의 유령이 된다.
유령들은 계속 고통을 찾아 다닌다. 유령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유령이 편가르기를 시작한다면 영원히 쓰레기를 만들어내게 된다. 이 쓰레기가 고통스럽다고 해도 현재로서는 도저히 없앨 방법도 제어할 방법도 없다. 고통을 줄이려면, 지금 가능한 방식은 화장실을 만들고 철저하게 상수도를 관리하는 일 뿐 거 같다. 블락을 최대한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
무한한 쓰레기장과 자폐된 화장실. 겹쳐진 두 공간을 하나의 몸으로 살아낼 수 있을까? 정신은 어떻게 될까? 이 제자리뛰기는 직관과 습관과 인격 형성의 원인일까 결과일까?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