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1일 일요일

보수성 이야기 1 - 섹스, 고통, 명예 그리고 트레이더스 마켓

섹스 고통 명예 그리고 트레이더스 마켓 - Treat me as a noble woman


공주는 성에 갇혀 있고, 용사는 괴물을 물리치고 영예를 얻어 공주와 결혼한다.

이 고전적이고 상징적인 로맨스 서사는 우리에게 가장 모범적인 거래 형태를 보여준다. 주체로 상정되는 용사는 괴물이라는 고통을 지불하고, 이로써 명예를 구입한다. 그리고 그 명예는 다시 섹스를 얻을 자격이 되는데, 이 섹스는 결혼이라는 행위와 거래된다(명예는 섹스와 거래된다). 이것은 독자적인 시장을 형성하며, 이 트레이더스 마켓에서 세 가지 가치는 교환된다. 문제는, 섹스는 교환해서는 안 되는 가치라는 점에서 출발한다.
1. 섹스

우리의 개념 체계 속에서 "섹스"는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거래할 수 없는 재화]. 그러나 이것은 거래되며, 제공자는 항상 여성이 된다. 섹스는 남성에게서 소비된다. 여성에게 있어 섹스는 오로지 소유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이것은 항상 약탈, 착취로써 은유된다-네 맘을 훔칠 사람은 나야 나, 입술을 훔치다, 순결을 빼앗다/정조를 지키다, 지조가 있다......-이것은 결국, 오로지 지켜져야 가치가 있는 개념이다. 이 언어체계 속에서 남성의 성은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남성은 그 자체로 항시 섹스지향적인 존재다.(미주1ㅡ미국인 할머니)

섹스가 거래 불가능한 재화인 것은 이것이 너무나 가치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가치 있냐면, 세상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나게 비싼 것이다. 여성은 온 우주를 준대도 섹스를 팔아서는 안 된다-그것은 그렇게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온 우주보다도, 한 여성의 지조는 더 가치가 있다. Intradalbe goods라는 의미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거래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거래할 만큼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재화를 거래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손해를 낳는다. 손해는 고통이다.
섹스가 거래불가능할 정도로 비싸다는 전제에서 시작해보면, 여성이 어떠한 대가를 받든 섹스를 거래하는 것은 항상 "손해보는" 것이며, , 멍청한 일이다. 우리는 살진 암소를 콩 세 쪽과 바꾸는 소년이 멍청하다는 것을 안다. 물질의 거래와 노동의 거래는 우리 머릿속에서 본능적으로 실재하는데-동물들조차 서로 호혜적 행동을 나누는 것을 봄으로써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사기까지 동원되는 꽤 고도의 경제활동이다.(미주2-동물들의 사회생활) 노동은 너무나도 재화이다. 대가가 없는 노동을 우리는 철저히 봉사, 예술, 헌신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을 안다. 이 단어들 속에 우리는 고통과 명예가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다만 노동은 대가가 포함된다. [대가 없는 노동]은 노동에서 대가를 빼기 위해 [대가 없는]이 반드시 포함되지만, 나머지는 대가 없음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섹스 역시 이 노동-봉사 사이에 존재하는데, 봉사 쪽에 보다 더 위치한다. 왜냐하면 섹스는 대가를 받기엔 너무나도 비싼 것이기 때문에 그 수여 방식은 언제나 봉사와 헌신, 또는 예술일수밖에 없다.

이러한 행위의 구분은 온전히 문화적이고 강제적인 것이다. 거래는 사유에서 시작된다. 이 사적 소유의 개념 때문에,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소유된다. 이것은 호칭에서 잘 드러나는데-대표적으로 친족언어에서 가부장제 부족은 각 남성을 중심으로 소유망이 존재하고, 가모장제 부족은 각 여성을 중심으로 소유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드러나다. 거래를 통해 가부장은 여성의 섹스를 소유하고, 지불되는 것은 명예다. 문제는 명예는 허상이고 섹스는 실재라는 것이다. 지불된 금화는 언제나 나뭇잎으로 바뀔 수 있다. 그렇게 없어진 명예는 지불자에게 다시 회수하는 게 아니라, 수신자에게 채무된다. 이 섹스-고통-명예 사이의 거래의 차익은 회수되는 것이 아니라 채무되는 것이다. 즉 여성은 명예를 잃지만 그것이 남성의 명예를 드높여주는 것은 항상 참은 아니다(미주3ㅡ바람둥이와 카사노바.)

이러한 일방적 손해 관계에서, 어떠한 정의의 조류-여성주의의 일말이 일었고, 이 채무를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에게 부과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섹스의 거래가 불합리했을 경우 그 채무는 당연히 지불자가 내야 하는 것이 우리의 통상적 경제관념에도 맞는 것이었다. 사기(명예의 지불 불이행-혼빙간 등), 약탈(강제적 섹스 탈취-성추행, 성폭행)은 범죄이므로 당연히 처벌 가능한 사유였다.

그리하여 현재 일반적으로, 여성의 성은 정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대가를 지불하고서만 획득할 수 있는 자원이다. "나를 고귀한 여성으로 대해주오"라는, Treat me as a noble woman이야말로 이 가치를 한 문장에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위의 것들이 다 개지랄염병이라는 점이다.

첫 번째로, 섹스는 거래 가능하다. 두 번째로, 우리는 폭력을 구분해야 한다. 세 번째로, 이 가치들은 스스로 발행되기 때문에 보다 정교해질 의무가 있다. 1에서는 첫 번째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섹스는 거래 가능하다. 섹스가 거래 불가능한 자원이라는 점이 수많은 불합리를 낳는다. 왜냐면 실제로 거래되고 있는데, 마치 거래되는 것이 섹스가 아닌 척하기 때문에, 그 진공의 자리에 다른 것들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해를 보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섹스를 섹스로서 거래하지 못한다. 나를 "싼 여자"로 보는 걸 참을 수 없어 한다. 섹스는 ""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소비하며, 나는 제공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서 애정, 헌신, 사랑(거래 불가능 영역에 있는 재화들)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것이 "거래 불가능한 자원들 사이의 거래"라는 점에서 우리 개념은 이것을 거래로서 포착하지 못하고, 그저 우울을 낳는다. "사랑 없는 섹스"를 하는 ''는 우울하고 고통스럽다: 그것은 대가 없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섹스는 그것이 거래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엄청나게 강력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 이 점에서 섹스는 헌신, 봉사, 예술과 다른 영역을 구성한다: 노동이지만 언제나 봉사다.

하지만 섹스가 거래 불가능하다는 점은 섹스 공급자를 위반자로 만든다. 심지어 사랑조차도, 섹스를 교환할 수 없다. 심지어 결혼조차도 섹스를 완벽하게 정당화하지는 않는다(이혼의 결함은 섹스를 제공했음이다). 여자는 순결을
잃는 순간, 거래 불가능한 물건을 팔았다는 점에서, 위반자가 된다. 이것은 이 대가를 소비자가 지불하든 생산자가 지불하든, 핵심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명예살인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명예살인은 어떤 문화에서(사실상 내가 아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음"의 죄목으로 여성을 (물리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죽이는 관습이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주체가 여성이 되었든 남성이 되었든, 손상당하는 대상은 여성의 섹스-여성의 명예다. 즉 성추행의 모든 죗값이 남성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 논리의 기저는 여성의 섹스라는 "가치 있는 물건" "훼손되었기 때문"이라는 은유가 들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의 폭력이 아니다-이 언술은 내게도 상당히 폭력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폭력의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
성추행이 폭력인 것은 그 개념을 둘러싼 모든 인과적 사태들의 끈끈한 접착 때문이며, 이는 실제로 그것들을 한 덩이로 묶는다. 인과적 근접성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다. 가장 근본적으로, 섹스 자원을 통해서 여성은 매개적으로 소유된다. 섹스 자원은 개념적으로 삽입이라는 행위와 가장 밀접되어 있다. 삽입은 살을 찢고 뼈를 비틀고 ""의 대리적 기생자를 실제로 그 육체에 위치시키는 행위-즉 임신과 직접적으로 연관한다. 결국 삽입은 섹스 소유를 이행한다.
이 삽입 이전에, 성기는 접촉되어야 한다. 이 이전에, 성기는 노출되어 시각적으로 접촉되어야 한다. 이 이전에, 성기에 삽입하려는 의도는 노출된 성기를 찾아 시각적으로 접촉하려고 해야 한다. 이 이전에, 성기의 위치에 맨살이 먼저 통과점으로써 등장한다-성기에 삽입하려는 의도로 노출된 성기를 찾아 시각적으로 접촉하려는 의도를 위해, 노출된 맨살을 찾아 시각적으로 접촉해야 한다. "남성" "여성"의 맨살을 보는 것은 이러한 인과에서 실질적으로 맨앞에 있다(개념적으로는 남성 자체가 그렇다). 차도르와 부르카, 한복, 안방, 드레스.... 등이 맨살을 가리는 것은 이 성적 약탈에서 여성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다.

의도가 없으면 정말로 이 불쾌함은 거의 없어진다. 성인 남성에게 맨살을 보일 때와 어린이, 동성에게 맨살을 보일 때의 기분은 확연히 다르다. 남성에게서는 약탈당할 공포-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인과의 롤러코스터는 곧장 추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남성이 "고자"라거나 "게이"라면 또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섹스앤더시티>에서, 미란다가 남자에게 알몸을 들켰다가 남자가 "저는 게이예요"라고 하니 긴장을 푸는 장면이 있었다. 이러한 게이의 '무의도적 시선'과 관련된 클리셰는 꽤나 많다 (미주4-이 인과적 원인이 실제임을 증거하는 것). 고로 남성의 시선은 폭력이다.

이것은 규정된 폭력이다. 그러나 실제의 폭력은 어디부터인가? 손상과 강제를 어찌되었거나 폭력이라고 생각해볼 때, "원치 않은 삽입"은 부정할 수 없이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인과적 롤러코스터에 있어서 정말로 어디부터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상대방의 이득(성적 쾌락?) 나의 피해? 이 모든 인과를 방지하기 위해, 결국 우리는 시선까지 폭력으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방어는 보수성을 고착한다. 일어날 수 있는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지만, 거꾸로 피해를 실재시킨다. 우리가 의심해보아야 할 부분은 정말로 섹스에 대한 위의 구조가 진실인가에 대해서다. 공주가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공주"라는 개념 자체를 우리는 의심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공주가 가두어진 성, 고통을 주는 괴물, 명예라는 보상이 모두 허구라면 공주 역시도 허구가 아닐까? 오히려 공주가 있기 때문에 성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공주는 해체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성, 괴물, 공주, 왕자는 문화적 실재로써 존재하므로 이를 모두 건너뛰고 재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몇십 억 인구의 머릿속에 있는 실재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진짜 성, 괴물, 공주, 왕자를 죽이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다. 다만 제안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창녀에서부터 생각해보자. 위의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창녀 혐오를 낳는다. 나는 앞서, 보수적 세계관에서 섹스는 트레이더스 마켓에 진입할 수 없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를 심지어 명예의 세계는 건너뛰고 정말로 현물 시장으로 진입시키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창녀다. 창녀는 공주를 억지로 자신의 협상 테이블 옆자리에 끌고 들어오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혐오된다. 창녀는 여성의 성을 노동으로써 판매하며, 즉 이 기호 시장 속에서 경제적으로 경쟁한다. 창녀는 섹스 시장을 침입하고 망가뜨리고 세계를 부순다.

보수적 관념 체계 속에서 여성이 폄하되는 것은 섹스의 값어치가 너무 높기 때문에, 가격 후려치기-점잖은 말로 흥정당하는 것이다. 남성은 고귀한 여인을 소비하고 싶지만 이를 지불할 가격-명예(명예는 신뢰체계이다)가 부족하거나 없을 시, 창녀와 비교함으로써 가격을 깎으려 한다. 이 시도는 여성의 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모욕이 아니라 성추행이다. 그것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시도 자체가 성추행이다. 거래 시도 자체가 성추행이다. 그것은 어차피 거래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거래는 훼손이고 약탈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창녀의 존재-창녀라는 개념의 존재 자체가 이러한 협상을 가능하게 만들며, 고로 창녀만 제거하면 마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착각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여성에게 남는 것은 고귀한 여성의 지위-섹스를 판매하는 순간 사라지는 그 지위다. Treat me as a noble woman은 결국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여성이 섹스를 비윤리적으로 소비할 수 없다면 이것은 해결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윤리와 도덕을 그토록 부르짖는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 당신들이 고통스러운 게 보수적 사회의 가부장제라면서 왜 그 법칙을 부르짖는 것인지?

우리는 섹스가 입고 있는 보수성을 벗길 필요가 있다. 그것을 지키고 약탈하는 소중한 무언가가 아니라 하나의 놀이 또는 스포츠 또는 거래 가능한 재화로 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창녀를 욕하는 것은 이미 그 협상 테이블에서 협상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나는 이렇게 싼 여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 테이블을 깨부수고 새로운 판을 짤 필요가 있다.

성추행으로 돌아가서, 시선은 어떻게 폭력이 되는가? 그것의 (은밀한) 의도 섹스 협상이기 때문이다. 나를 섹스 공급자로 보고 있다는 것은, 내 섹스 가치를 훼손시킨다. 여기서 상대방이 시선만으로 성적 이득을 취하고 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것은 실제로 섹스가 공급된 상황이다. 이미 손해를 봤다. 보수주의에 기대지 않는다면, 이에 대처할 방법이 무엇인가? 가서 돈이라도 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그 못생긴(보통 못생겼다고 가정되므로 그렇다고 하자) 남성을 봄으로써 내가 성적 이득을 얻을 것인가?(얻을 수 없다. 첫 번째로 개념 이전에 거래 가능한 정도의 매력이 있다면 성추행으로 인식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두 번째로 이 개념 체계 속에서 여성이 성적 이득을 얻는 것은 남성에게 추가적인 섹스 공급일 뿐이다. 상대방을 만족시킨다는 상상 자체가 흥분을 준다”. 가끔 자신이 소비한 것이 성녀가 아니라 창녀라는 사실에 식어버리는 남성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개념 체계는 문화적으로 실재하므로 내가 손해를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더라도, 손해는 존재한다.

전통적인 대처 방법은 고통이다.

2. 고통

채무된 불명예는 고통을 발행함으로써 갚아진다. 아까 말했던 거래 관계를 다시 짚어보자면고통은 명예로, 명예는 섹스로 전환된다. 그런데 섹스 공급자가 섹스와 명예를 거래하지 못하고 "약탈"당했다면, 그이의 명예는 어디서 찾아와야 하는가?

가장 흔한 대처법으로는, 그이는 고통을 자가발행한다-섹스를 약탈당한 사람이 고통스럽지 않다면 그이는 "창녀" 취급될 것이다. 그러나 고통을 자가발행한다면, 적어도 고통스러운만큼의 명예로 전환될 것이며, 이는 그이의 불명예를 덜어준다. "순결을 잃고 고통스러워해야" 약탈된 명예의 일부를 지킬 있다
또는 약탈자에게서 명예를 탈환하는 방법도 있다. 이것은 해당 남성을 본인이 직접 살해하는 경우인데, 드물지만 존재한다. "납치된 공주가 악당을 죽이는" 클리셰를 생각해 있다.
가지 기제 모두 보수적 여성주의에서 사용되는 방법이다. 전자는 현재 2차가해, 피해자중심주의와 맞닿은 개념이다-오히려 고통을 이겨내고 명예를 쟁취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동시에 주변에서는 당사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해야만 이루어지는 구조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글도 많고, 직접 쓰기도 했으니([미지살해일지]), 참고하기 바란다. 후자의 경우엔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어떤 여성들이 흔하게 고추를 가위로 잘라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을 보이는데, 개념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고로 역시 고통, 트라우마 표출이다.

고통 발행의 문제점은 이것이 인플레이션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고통은 외부에서 오는 고통이 아니라 내부에서 오는 고통이기 때문에 보증 수단의 신뢰성이 낮다. , 누군가가 병을 앓거나/악당을 죽이거나/험난한 일을 행했다면 물증을 기반으로 쉽게 명예로이 취급되지만, 내면에서 발생한 고통을 극복했다는 종류의 명예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성추행의 경우, 명예의 훼손에 의한 고통이기 때문에 더더욱, 훼손당한 명예에서 발급되는 고통은 더더욱 증명할 필요를 지닌다. 그래서 공급자는 "더더욱 피해자" 되어야 필연적 귀결에 빠진다.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워야 한다. 피해자가 당당할 있는 순간은 피해자가 당당하다고 말하는 순간뿐이다. "피해자"라는 레테르에는 이미 고통이 들어 있다.

그래서 "너도 즐겼잖아"라는 말은, 성추행 사건에서 피해자를 피해자가 아니게 만든다. 성추행 사건은 "고통", 섹스 약탈에 대한 명예 훼손의 증거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이것은 명예를 실추시킨 무언가가 아니었다는 뜻일 것이므로. 결국 섹스 공급자는 언제나 명예 실추에 대비하기 위해, 섹스를 즐길 없다. 이것은 추후에 약탈자를 응징하기 위해서든,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든 고통 화폐는 발급되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 화폐가 부족했다면, 그이는 창녀로 처리된다. 창녀는 섹스를 명예가 아니라 돈에 팔았으므로, 명예는 없다. 그러나 지불해야 고통 역시 (논리적으로는) 없다.

하지만 명예가 없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

3. 명예

명예는 재화 이전의 재화다. 공적인 신뢰성이라고도 있다. 명예로운 사람은 믿음직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믿음직하다는 것은 그와의 거래에서 투명성이 보장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동물도 불명예스러운 자와는 말조차 섞고 싶어하지 않는다( 역시 정보의 거래이므로). , 불명예는 사기꾼의 증표다.

창녀가 사기꾼이 되는 것은 섹스를 헐값에 판매하는 것인데- 가지 측면에서 사기다. 번째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기인데, 거래불가능한 재화를 값에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자존감이 없다면 그이는 자기 자신을 못미더워할 것이다. 번째로 거래 상대자에 대한 사기인데, 여성의 섹스라고 보통 이것은 "고귀한 여성"과의 섹스다. 고귀한 여성과의 섹스만이 진짜 섹스로 여겨진다-그것이 명예 시장 체계 안에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녀와의 섹스는 본질적으로, 물리적으로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명예 시장 체계 바깥에 있으므로, 고귀한 여성과의 섹스가 아니다. 번째는 행위의 당사자 다에게 불명예를 준다.

명예는 신뢰성이다. 명예가 없으면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들다. 이것에 대해서 굳이 길게 설명해야 하는가? 신용등급만 봐도 있지 않은가? 다만 금전적인 신용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적인 신용, 정보 거래적인 신용 다양한 신용이 있고, 모든 것이 부족한 불명예스러운 자는 고립된다. 고립은 인간이 가장 지양하는 부분 하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불명예를 피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아무도 창녀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협상 테이블에 놓여 있는 말은 다음과 같다: 남성(섹스 수요자), 고귀한 여성, 창녀. 말들을 가지고 하는 게임은 모두 고전적 범위로 들어가야 것이다. 창녀를 벌하든, 남성을 벌하든 사용되는 법칙과 컴포넌트는 같다. 고귀한 여성은 창녀로 변할 있으므로 결국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게임이며, 남성이 여성을 약탈하느냐/약탈하지 못하느냐, 명예를 지키느냐/지키지 못하느냐의 일방향적 게임이다. 무브의 차이가 없다.

생각에는  낡은 협상 테이블을 부수고, 새로운 트레이더스 마켓용 협상 테이블을 만드는 낫지 않은가 싶다.


4. 트레이더스 마켓

가지의 트레이더스 마켓을 생각해볼 있다.

1. 섹스 수요자가 - 남성과 여성, 공급자는 - 고귀한 남성, 여성, 창녀, 남창.
2. 각자가 섹스의 수요자이자 공급자 - 섹스 소비자.

2번은 이상적이고 매우 간단하다. 하지만 추상적이며, 어떻게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1번은 현재 일어나고 있으므로 먼저 이야기해보자.

1번은 앞서 이야기한 1, 2, 3 논리를 그대로 남성에게도 확장 적용시키는 것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으며, 사실 그렇게 새로운가 싶기도 하다. /객체로서의 /남성을 추가한 것뿐이다. 이것은 계급, 보수성, 문화적 실재들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 그러므로 사실 "남성의 섹스 명예"라는 개념은 "여성의 섹스 명예" 아주 흐릿한 잔상일 , 실재한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그가 불명예스러울 있지만, 고통을 발행하면서까지 처리해야 만큼의 채무일까? 남성의 섹스 명예는 오히려 "약탈을 하지 못함" 가깝고-그래서 트페미니즘/워마디즘에서는 "약탈을 없을 만큼 약한 한남" 이미지를 밀고 있지 않은가(약탈을 있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는 한남일까, -한남일까)? 약탈이 가능할 만큼의 재원이 없다면 시장은 고사한다. 수요자와 공급자를 늘리는 것은 이렇게 단순한 반전-미러링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나는 결국 가능한 방법은 해방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창녀와 남창이 된다면, 누구도 누구를 구매하기 위해 명예를 지불해야 필요가 없다면, 명예를 구매하기 위해 고통을 발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실상 고통은 우리의 유일한 화폐이며, 고통의 무한한 발행은 우리 모두를 고통 생산기로 만들 뿐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여성을 하나의 소유물로 보는 관점 속에 있으며, 보수주의는 이것을 결코 깨뜨릴 없다.

이에 새로운 관점을 만들었을 때, 우리가 반대해야 할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1. 후려치기

트레이더스 마켓에서 상대방을 "후려치기"하는 사람들을 반대해야 한다. 상대방의 외모나 신체적 매력을 "후려치는" 사람들은 가격을 깎으려 드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성공하도록 놔두는 것은 전체 시장에 같은 전략을 퍼뜨리게 만든다. 괜히 어떤 사람들이 트라우마타이즈 되어서 "나는 예뻐, 나는 아름다워"라고 읊조리는 것이 아니다. 후려침은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되는데, 그러지 말자. 다만 신경증 환자들을 위해 덧붙이는데,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후려치기가 아니다.

2. 고통의 구분

명예 훼손에 의한 고통과 그렇지 않은 고통을 구분해야 한다. 명예 훼손이 물리적 사태에 의존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여러 차원의 물리적 사태들이 같은 수준의 명예 훼손-성추행-으로 등치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분리되어야 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폭력의 롤러코스터"에서 어디까지가 상흔이고 어디까지가 기분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모두가 섹스의 소비자가 되려면 누구나 섹스를 즐길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현재 그러지 못하는 것은 이 섹스가 너무 비싼 가치에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며, 이것이 결국 불합리를 낳았다. 2번의 트레이더스 마켓은 보수적 명예 가치 체계의 섹스관을 부숨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섹스는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세대가 아니면 어느 미래의 세대라도, 섹스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생물 몸을 가지든 로봇 몸을 가지든 그것은 강력한 계약과 초고가 거래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술자리나 동호회, 스포츠가 될 것이다. 먼 미래 우리가 육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면, 위의 헛소리들은 마치 신학으로또는 야만인의 약탈전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나는 실재하는 여성의 고통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P.S. 어떤 게이들이 이성간 성추행의 방식을 그대로 수용하는 이유는 그들이 공주이기 때문이다.

*미주1-미국인 할머니
트위터의 한 트윗에서, 집주인 할머니가 "밝은 방에서 나체로 단둘이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한 관계일 때 섹스를 해야 한다고 하는 트윗이 많은 공감( 2 RT)을 받았다. "남성"에 대해 생각해보면 독특하다. 그의 성욕, 그의 발기는 ""에게 제어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어떻게? 우리는 성적 지향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켜 왔고, "남성"의 경우 나체의 ""에게 반사적으로 흥분을 느끼지 않으려면 지향성에 있어서 완전한 호모섹슈얼이거나 에이섹슈얼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 "미국인 집주인 할머니"는 그 "남성"이 섹스가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그 관념 체계 안에서 남자가 항시 (여성에 대해) 섹스지향적이기 때문이며, 나는 이 부분에서 여자가 허락하면 당연히 섹스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보지 달린 무언가" ""를 보지 않는 "자지 달린 무언가"의 존재는 좀 기이하다.

*미주2-동물들의 사회생활, 리 듀거킨
꽤나 고전적인 진화생물학 책인데,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어떤 사슴인지 영양인지의 무리가 서로 핥아주기를 호혜성 기반으로 하면서 마지막 핥아줌에 대한 대가는 치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자는 상대방에게 받아낼 것이 남아 있을 때까지만 노동을 해준다는 점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사기치는 이기적 동물]이라는 다소 낡은 관점이 포함되어 있지만 눈여겨 볼 만하다.

*미주3-바람둥이와 카사노바
많은 여성과 섹스한 남성을 칭송하는 문화가 분명 있으므로 이 주장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섹스 약탈로써 얻은 명예가 아니라, 남성성에서 얻은 "명성"이다. 섹스 약탈자는 분명히 불명예스럽다 - 강간범에 대한 처벌이 시대마다 달랐을지 몰라도, 그것이 불명예스러운 것이라는 점에서는 언제나 일치했다. 다만 이것이 어떠한 탈색을 거치면-영웅화되면 "명성"을 얻게 되는데, 카사노바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좋을 법하다. "돈을 그렇게나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엄청나게 능력이 있을 것이다"라고 추리하듯, "섹스를 그렇게 많이 한 사람/어떤 엄청나게 고귀한 여성과 섹스한 사람이라면 분명 엄청나게 매력적일 것이다"라고 추리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모든 문화적 실재들 덕분에 ""에 갇힌 "섹스"를 얻으려면 시련, 명예, 매력 등이 필요해지는데, 이 모든 것을 반복적으로 증명해내는 카사노바에게는 이러한 명성이 올라가는 것이지 결코 명예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그에게 돈을 맡기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주4 - 1. 게이, 여성, 어린이, 고자 2. 시선 강간 3. 바바리맨
1. 시선이 폭력이려면 거기에는 의도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남성은 그 의도가 고정되어 있어서(섹스) 결코 폭력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의 신분이 여성이라면, 또는 남성이더라도 어린 남성, 게이 남성, 고자라면 폭력이 아니게 될 수 있다.
2. 그리하여 남성이 보는 것은 폭력이며, 시선 강간이다. 왜냐하면 인과적 롤러코스터는 이 남성의 시선에서 출발되기 때문에, 순식간에 "더럽혀졌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시선 강간"이라는 개념어를 낳는다.

3. 거꾸로 이것이 언제나 여성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으로는 바바리맨이 있다. 여성이 남성의 시선에 닿는 것도 성적 약탈이지만, 남성이 여성의 시선에 닿는 것도 오히려 역으로 "성적 약탈"이다. 이것은 약탈자-남성과 피약탈자-여성이 공리로써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바바리맨이 "약탈 불가능할 정도로 약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것, 또는 여성 쪽에서 "노골적으로 약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만이 대응책이 되는 것 역시 이를 방증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