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26일 금요일

보수성 이야기 3 - 고통 생산기


고통 생산기

 
1. “흔히, 정체성 정치는 아카데미아 안보다 밖에서 훨씬 더 문제가 된다. 미국의 주류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 커뮤니티는 더 예외적이거나 더 피해를 받는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논쟁하며 () 다른 그룹에 비해 더 억압받고 더 우월함을 주장하기 위한 초월적 예외주의가 되기 일쑤다(Often, identity politics becomes far more of a problem outside than inside academia. In mainstream gay, lesbian, and trans communities in the United States, battles rage about what group occupies the more transgressive or aggrieved position () In this context then, ”transgressive exceptionalism“ refers to the practice of taking the moral high ground by claiming to be more oppressed and more extraordinary than others).”, Judith Halberstam, <In a Queer time and Place>, 2005, NYU Press, p20.
2. 국교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로마 경제 형태를 비난하는 따위의 현실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아담의 운명적 저주를 받아들였다-다시말해 노예제도를 고상한 개념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하인리히 E. 야콥, 빵의 역사, 203p)
3. 모든 행복과 쾌락은 허상인 반면에 고통은 실제적이다. 따라서 삶은 향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살아내고 견뎌내기 위해서 있다. (...) 우리는 고통을 대가로 쾌락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부정적이고 허상에 불과한 것을 얻으려고 긍정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지불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
4. 강렬한 행복은 한순간에 지나가는 감정이다. 누군가 냉소적으로 말했듯이 삶이란 짧은 행복의 순간이 잠깐씩 끼어드는 고통의 기나긴 연속인 것이다. (털없는 원숭이의 행복론, 데즈먼드 모리스, 16p)
 
 
앞선 보수성 이야기 글들에서, 보수주의의 결말은 재화로서의 고통의 발행임을 말했다. 고통의 호소는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보수주의 속의 피해자-주체는 최종 생산물로써 고통을 생산한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인간이 모방하며, 상상한다는 점이다. 고통은 모방되고 상상돼 버린다. 이 넘치는 고통 화폐, 원래 피해자가 명예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였던 양화는 악화로 전락한다. 이 모든 고통 화폐를 명예로 바꿔주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것은 고통의 가치를 절대 의심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고통에 응답하는 것을 규범으로 만듦으로써 말이다.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상상된 고통이다. 상상된 고통은 두 가지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고통과 상상된 피해자의 고통이 그것이다.
다가오지 않은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사실상 지성이 있는 이유 그 자체다. 우리는 고통을 상상하기 위해 존재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행복은 얻어지거나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4의 데즈먼드 모리스의 말처럼, 행복은 순간과 순간 사이에만 잠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지향되도록 설계된다. 그러나 고통은 지속되며, 존재한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는 존재다. 전기 철조망에 다가가지 않는 개들처럼, 대부분은 고통이 없는 영역을 구성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그것은 보통 공간으로 상상된다. 미래의 가정, 미래의 사회 등으로. 그러나 이것은 이 비-고통이 실현되지 않은 상태의 반대항으로써 구성된다. 행복한 미래는 고통스러운 현재에서 상상된다.
 
이 고통스러운 현재는 실재의 고통에 의해 실현되는 경우보다, 상상된 고통에 실현되는 경우가 더 많다. 다가오지 않은 고통은 상상되며, 그것을 겪는 것이 불가항력이라고 생각되는 순간 즉시 고통으로-말하자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육화한다. 스트레스 반응은 우리를 다가올 고통에 회피할 방안을 촉구시키지만, 만약 삶 그 자체가 다가오지 않을 고통으로 인식된다면 이에 벗어날 방법은 없다. 고통 화폐가 마를 일은 없다.
 
두 번째로, 상상된 피해자의 고통은, 어떤 사건의 피해자를 먼저 상상한 다음 그 피해자의 고통에 미리 공감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나의 고통이라고도 말해버린다. 이 행위는 결국 첫 번째 상상된 고통의 가치를 높이기 위함인데, 이를 위해서라도 피해자는 고통스러워야만 한다. 상상된 피해자가 존재하기 위해 사건은 피해로서 구성되어야만 한다. 이 상상된 피해자는 영원히 행복할 수가 없다(동시에, 아무도 이해할 수도 없다!) 어떤 사건의 피해자가 구해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일반적인 피해자는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므로, 상상된 피해자를 상상하는 그 자신의 고통 역시도 진실하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고양이를 보호하려는 여자가 아무리 많은 고양이를 구한대도 아직 고통받는 고양이가 남아 있으므로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 여성의 머릿속에 맴도는 것은 오직 자신이 구하지 못한 고양이들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성공한 일로 행복해하기 보다는 자신이 실패한 일로 인해서 괴로워했다. …… 협동의 행복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적정한 규모를 설정해야 한다.", 52p.)(보통 종교, 팬덤에서 많이 쓰이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 XX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 상상된 예수님의 상상된 고통에 보답해드려야 한다. 실제로 고통스러웠는지, 이 행동이 보답인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며 이 상상 체계 속에서만 정합하면 된다.)
 
이 상상된 피해자의 고통까지도 자신의 고통으로 써버릴 정도라면, 고통 화폐는 정말로 무에서 발행된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이렇게 즐비한 사태는 가치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존중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고통의 가치를 높이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고통의 환율 고정, 정가제, 바로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다. 고통의 가격은 고정된다. 이것을 깎으려는 시도는 이렇게 생산된 모든 고통의 가치와 관계되므로, 상상조차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 압력은 사회적이다. 누군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 기대를 저버리는 차단점이 된다. 결국 화폐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끼리만의 시장이 구성된다. 스파르타의 쇠막대나 가야의 덩이쇠처럼.
 
고통스러운 사람을 존중하자는 것, 이러한 전략은 일반적으로, 그러니까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는 전반적 유효성을 띤다. 마치 '비쌀수록 좋은 물건이다'라는 통념처럼 뇌가 고생할 일을 많이 줄여줄 것이다. 그렇게 효과적인 기제기 때문에 본능적인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 전체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면, 도시는 환경을 컨트롤할 수 없으며 불의의 악의는 언제나 가능성을 가지므로, 고통의 윤전기는 결코 멈출 수가 없다.
 
특히 트위터에서는 이 고통 윤전기를 돌리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반향실을 형성하여, 누구나 고통을 호소한다. 그들이 회피하는 모든 것들. 세상 모든 것이 고통의 자원이 되고, 이것은 재해석되기 힘들어진다. 새로운 고통 자원을 발견하고, 모두가 이것의 피해자가 되어 고통을 생산하고, 모두가 이것을 서로의 명예로 환전해준다. 더 많은 고통을 가진 사람일수록 세상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진다고 여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X라는 사건이 남자에 의해 일어났을 경우, "여자였다면 부정적이었을 것 /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자에 의해 일어났을 경우, "남자였다면 더 쉬웠을 것 / 긍정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리고 그 부정적 상황들에 자신을 대입하여 손쉽게 고통을 얻는다. 이 바꿔쓰기에 쓰이는 이항대립은 남성/여성, 시헤유/퀴어,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등이 있다.
 
결국 모든 사건이 아쉽고 박탈된 사건이 된다. 모든 원인이 "네가 남자여서" "내가 여자여서", "네가 시헤유여서" "내가 소수자여서"로 해석되고 박수받는다. 다른 의견, 다른 선택지는 생성조차 되지 못한다. 2의 하인리히 야콥의 말처럼, 이들의 고통 생산 헤게모니는 부당함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기보다는 여자/퀴어/저소득층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해진다. 성공한 상황에서는 더 성공한 남성을 상상하거나/찾고, 실패한 상황에서는 실패하지 않은 남성을 상상하거나/찾아서 박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상상하기 급급하다. 이러한 박탈감은 주어진 적도 없지만 날 때부터 박탈된 것에 대해 느끼는 것이다. 이 박탈감이 그들에게 동질감, 소속감을 준다. 1에서 할버스탐이 말했던 것처럼, 오로지 고통을 말하는 것이 이 집단의 목표가 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러한 종류의 박탈감을, 고통 생산을 코어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존재가 된다. 우울증, 신경증, 결벽증을 가진 이들의 고통은, 문제적으로도, 진짜다. 고통의 그 절대적 주관성 때문에 생성된 고통에 "만약"을 제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그 고통은 언제나 회피 불가능한 참이라는 것이다(분명 그렇지 않을 텐데도). 그리하여 어떤 타인에게는 고통이 아닌 일들까지도 이들에게는 항시 고통이 되기 때문에, 이들의 고통 재화는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고통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서 이러한 타인은 제거되어야 한다. 한 번의 의심조차 허락될 수가 없다-화폐의 신뢰성이 폭락할 테니까.
 
우리는 고통 생산기를 어떻게 다뤄야 할까?
 
우울은 병증이라는 인식은 치료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비정상 상태라는 인식도 낳았다. 그러나 분명 모든 인간에게 우울은 찾아오며, 그 기간과 강도에 있어서 도움이 필요한, 제어불가능한 상태가 있고, 많은 경우 약물로 조절 가능한 상태다. 하지만 이것을 자신의 코어 정체성으로 삼으면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가 자기부정으로 읽히며(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그렇게 고통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활달한 상태를 지향하는 게 나을 텐데도 말이다), 외부의 극적 변환 없이는 치유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외부는 웬만해서는 바뀌지도 않고, 인식론적으로, 외부를 논하는 것 자체가 애매한 대상이다. 그러니 우울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이들에게 있어서 꽤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데-이 상태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의 고통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공포 때문이다. 즉 책임져야 한다는 망상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일은 그렇게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의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고통스러운 상태는 특수하고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이 고통스러운 상태가 비정상적이라 느끼고 타인의 행복을 상상하여 박탈감을 느끼는 것은, 역시도 특수하고 비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지만, 그것은 피할 수 있는 상태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